빈틈 없이 꽉찬 남자, 곳곳에 구멍 난 사내 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보고 있으면 “어쩜 저렇게 잘 할까” 싶어 눈길을 뗄 수 없는 배우가 있다. 김윤석(41)도 그렇다. 다섯 장면 나왔을 뿐인데 순식간에 유명해진 ‘타짜’는 말할 것도 없고 520만 관객을 동원한 지난해 ‘추격자’까지 항상 그의 연기를 보는 일은 본전 생각 안 나는 ‘남는 장사’에 가까웠다. 11일 개봉하는 휴먼코미디 ‘거북이 달린다’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감과 동시에 ‘역시’ 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좋은 영화는 배우 혼자 만드는 게 아니라 모든 상황이 조화를 이뤄야 가능하다”고 말하는 김윤석. ‘거북이 달린다’는 그의 연기와 여러 상황이 잘 조화된 휴먼코미디다. [김경빈 기자]


그의 역할은 다소 게으르고 매우 느리며 심하게 능력 없는 충청도 시골형사 조필성. 영화는 필성이 신출귀몰 탈주범 기태(정경호)에게 소싸움에서 딴 돈을 빼앗기면서 벌어지는 소극(笑劇)이다. 필성은 기태에게 가스총을 쏘다 자기가 가스에 되려 질식해 쓰러지는, 뭘 해도 되는 게 없는 남자. 동네 똥개마저 그를 조롱한다. 어린 딸과의 약속을 지키고 다섯 살 연상 아내(견미리)에게 위신을 세우려 버둥대는 안쓰러운 모습이라니. 4일 그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났다(물론 실제로 그는 위의 세 가지 특징과는 거리가 멀다. 대학로 연극배우 시절에도 그는 꼬박꼬박 아내에게 월급을 갖다줬던 성실한 가장이었다).

-‘타짜’ 끝나고 들어온 대본의 절반이 악역이었다는 얘길 한 적 있다. ‘추격자’ 이후는 어땠나.

“당연히 스릴러가 몰렸다. 아니, 대한민국 영화 트렌드가 일제히 스릴러로 바뀌었으니까(웃음). 스릴러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외람된 얘기지만 ‘추격자’ 이상 가는 스릴러는 나오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거북이 달린다’의 이연우 감독은 2002년 ‘2424’ 이후 작품이 없었다.

“사람들이 ‘한국 영화 사상 최악의 영화’를 꼽을 때 항상 들어가던데(웃음), 난 그 영화를 못 봤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시골 마을의 푸근한 사람 냄새가 제대로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감독이 직접 쓴 거라고 했다. 그래서 만났다. 자기 고향 얘기라고 하더라. 내친 김에 같이 그곳 예산으로 내려갔다. 필성이 근무하는 경찰서, 필성의 아내가 운영하는 만화가게 자리를 다 봐놨더라. 무슨 얘기를 할지 정확히 이해하고 준비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부산에서 오래 살았는데도 충청도 사투리가 착착 감긴다.

“나한테 지방언어의 리듬감을 익히는 재주가 좀 있나보다. 촬영기간 내내 영화 무대였던 충남 예산과 숙소가 있던 덕산에서 살다시피 했다. 식당도 가고 당구장도 가면서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정서가 조금씩 다가왔다. 목적어를 꼭 서술어 뒤에 놓는다든가 하는 그들의 습관 뒤에 깔린 정서를 육화시키는 게 내 몫이었다. 맛깔스런 우리말이 담긴 이문구 선생의 『관촌수필』도 참고했다.”

-베드신(?)에서 아내의 구멍난 팬티를 발견하는 장면이 정말 웃겼다. 견미리씨가 ‘20년 산 부부처럼 편하게 찍었다’고 하던데.

“첫 만남에서 내가 그랬다. ‘선배는 궁뎅이만 좀 보여주시면 됩니다. 뽀뽀는 팔뚝에만 살짝 할게요.’ 견선배가 워낙 프로라 내가 편했다.”

-필성과 동네 친구 용배 패거리가 하는 행동을 보면 안 웃을 수가 없다.

“필성과 용배 패거리가 하는 짓들은 충청도판 ‘덤 앤 더머’ 수준이다. 충청도 사투리에 ‘개갈 안 난다’는 말이 있다. 미흡하다, 실속 없다 뭐 이런 뜻인데 필성이는 하는 짓이 다 개갈 안 나는 짓이다. 그러니 웃길 수밖에.”

-‘500만 영화’ 주연을 하고 나서 인생에서 가장 달라진 점은.

“촬영 시작 전 고사 지낼 때 절하는 순서가 맨 앞으로 온 것, 돈 내는 액수가 늘어난 것(웃음). 내 이름을 보고 극장에 오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이 훨씬 더 커졌다. 알아보는 동네 사람들도 더 많아졌다. 최근에 집을 팔았는데, 집 보러 온 사람이 거실에 있는 가족사진을 보고 주인이 김윤석이라는 걸 알았다. ‘추격자’ 주연배우 집이니 터에 복이 넘친다고 그 자리에서 계약했다. 이사 간 아파트에서도 떡을 돌릴 필요가 없었다. 부동산 사장님이 이미 ‘김윤석 이사온다’고 소문을 다 내놨더라.”

-예전에 ‘제일 싫은 게 메이크업’이라고 했는데 아직도 그런가.

“드라이 하는 것도 싫다. 너무 뜨겁다. 드라이 좀 안 하면 안 될까.”

기선민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