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석학 어렵게 유치해 놓고 한글로 보고서 제출하라니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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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외국인 과학자는 국가연구과제의 책임자가 될 수 없어요. 과제 기획서도 ‘아래아 한글’을 이용해 한글로만 작성해 제출하도록 하니 외국인들한테는 문자 그대로 남의 나라 이야기이지요. 연봉 수억원씩 주고 고명하다는 외국인 과학자 모셔다 놓으면 뭘 합니까.”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주최로 3일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전문가 포럼에서 나온 이야기다. 세미나 주제는 ‘해외 우수 인재와 연구기관 유치 전략’.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란 정부가 2015년까지 7년간 3조5500억원을 투자하기로 돼 있는 거대 프로젝트다. 우수 인재와 연구기관 유치는 이 계획의 성공 여부를 가르는 필수 전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실은 막막하다. 이를 추진할 인프라와 제도가 극히 열악하기 때문이다. 세계 수준의 두뇌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로 몰려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않은 채 계획을 밀어붙였다간 혈세만 낭비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날 포럼에서는 ▶외국 전문가라는 존재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품지 말 것 ▶초빙 조건을 계약서에 빈틈없이 규정할 것 ▶국내 제도와 외국인 체류 환경을 개선할 것 등을 우수 연구자 유치의 관건으로 꼽았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의 실무 책임을 맡은 과학기술기획평가원의 이기종 본부장은 “고액 연봉만으로는 외국인 우수 연구자를 끌어들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외국인이 국내에서 한국인처럼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거주나 자녀교육 등과 관련된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가령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주변에 외국인 학교를 설립하는 일 등을 제안했다.

서울대 홍국선 교수는 교육과학기술부의 ‘세계 수준의 대학(WCU)’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올해 시행한 해외 석학 초빙 프로그램이 해외 우수 인재 유치의 반면 교사라고 비판했다. 그는 “외국인만 불러다 놓으면 다 되는 줄 안다. 지적재산권 문제 등 계약 조건들을 엄밀하게 하지 않아 나중에 이해 관계를 조정하기 힘들고 불편한 관계가 되기 일쑤”라고 지적했다.

다음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송용일 박사의 제언. “해외 우수 연구자들이 가능하다면 자신이 원하는 연구자를 채용해 연구팀을 구성할 권한을 주고, 연구비도 거기에 합당하게 충분히 지원해야 한다. 홍콩과학기술대학은 미국 MIT 교수 한 명을 유치하는 데 70억원을 쓴다. 연구 환경뿐만 아니라 교육과 문화·복지 같은 문제도 세심하게 배려해야 해외 석학 유치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박방주 과학전문기자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한국이 선진국에 크게 뒤떨어진 기초과학을 진흥하기 위해 건설하려는 과학연구단지. 종사자 3000명 규모의 기초과학연구원을 설립하고, 중이온가속기를 설치한다는 구상이다. 가장 큰 특징은 각국의 우수 두뇌를 불러모으겠다는 포부다. 현재 이 벨트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올해부터 2015년까지 7년간 총예산은 3조5500억원으로 잡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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