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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우울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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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1888년 크리스마스 전날 밤 프랑스 남쪽 작은 마을 아를. 화가 고갱이 저녁 후 산책에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낯익은 발걸음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친구 고흐가 면도칼을 들고 달려들 참이었다. 고갱이 노려보자 고흐는 머리를 떨어뜨리고 돌아섰다. 혼자 집으로 돌아간 고흐는 자신의 왼쪽 귀를 잘랐다. 수건으로 대충 피를 막고 귀를 감싼 고흐는 귓불을 깨끗이 씻어 종이에 싸들고 사창가로 가 동침한 적이 있던 창녀에게 건네준다. 창녀의 연락을 받은 경찰이 다음날 아침 고흐를 병원으로 옮겼다. 그로부터 2년 뒤 37세로 권총 자살하기까지 짧은 기간 고흐는 정신병원을 드나들며 무수한 명작을 남겼다.

고흐의 우울증이 자해로 발작하게 된 계기는 좌절감이다. 아를에 정착한 고흐는 자신의 아틀리에로 동료 화가들을 불러 같이 작업하고자 했다. 그의 초청에 응한 유일한 사람이 고갱이었다. 그러나 두 천재의 개성은 곧바로 충돌했다. 집착이 좌절되면 공격 충동을 유발한다. 꿈을 깨뜨린 사람을 공격하고자 한다. 그것마저 좌절될 경우 공격 본능은 스스로를 향해 발산된다.

한국판 고흐는 이중섭이다. 꽤나 인정받던 화가의 비극은 한국전쟁으로 시작됐다. 1953년 전란 끝에 병든 일본인 아내와 두 아들을 섬나라로 보냈다. 보고 싶은 마음에 담뱃갑 은박지에 못으로 벌거벗은 아이들을 그렸다. 그림을 팔고도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부끄러워해 돈을 받지 못하고, 아내가 송금해온 뱃삯마저 사기당해 현해탄을 건너지 못하는 한(恨)은 쌓여만 갔다. 54년 말부터 정신장애가 나타났다. 자신의 신체 일부를 해코지하기 시작했다. 음식을 거부했다. 56년 자학적인 음주와 신경쇠약으로 40세의 삶을 마감했다. 그 역시 말년의 불꽃 같은 창작열을 신화로 남겼다.

천재들의 우울증은 창작의 추동력이라지만 일반적으로는 저주요 비극이다. 한국형 우울증은 '화병'이라 따로 불릴 정도로 흔하다. 당하며 살아온 고달픈 역사에 그나마 안으로 삭여야 하는 권위적 가치를 지켜오다 보니 울화가 치미는 일이 많았던 탓이다. 그래서인지 이헌재 부총리가 우리 경제를 우울증 환자에 비유한 대목이 와닿는다. 우울증이 고치기는 힘들지만 정신분열증과 달리 자각할 수 있는 병이라 다행이다.

오병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