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9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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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미닫이 문이 벌컥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태호와 동년배라던 식당주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느닷없이 태호가 납치당했다고 소리치는 것이었다.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놀란 것은, 사건의 충격성에도 불구하고 신중해야 할 식당주인으로선 대중없이 사용해서는 안될 납치라는 용어였다.

그처럼 함부로 사용해선 안될 말이 하얗게 질린 사람의 입에서 터져나왔다면, 사태는 물어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당장 다급한 게 분명했다.두 번 물어볼 것도 없이 문 앞을 가로막고 선 주인의 어깨를 밀치고 총알처럼 밖으로 뛰어나가고 있는 사람은 봉환이었다.

잽싸게 운전석으로 올라 시동을 걸고 있는 봉환에게 주인은 두 사람이 태호를 납치해 평창 쪽으로 달아났다고 일러 주었다.납치범들이 승용차에 태호를 끌어넣고 사라진 지는 불과 5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조수석에는 식당주인이 동승해 있었다.야간운전에는 이골이 난 봉환은 페달을 깊숙하게 밟아 주행속도를 높이면서 조수석의 주인에게 안전띠를 단단히 조이고 손잡이를 단단히 잡으라고 일렀다.

봉환이가 방에서 뛰어나가 차를 몰고 평창 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걸린 시간은 이삼분도 아닌 눈 깜짝할 사이라 할 수 있었다.사건의 내막을 대강이나마 따져볼 겨를도 없었던 변씨와 철규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평창길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그 사이 봉환의 차는 벌써 소나기재를 넘어 문곡리 삼거리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속도계의 바늘이 백삼십킬로 이상에서 간들거리고 있었는데, 5분전에 떠났다는 납치범들의 승용차는 삼거리에 당도할 때까지 따라잡을 수 없었다.그러나 그 삼거리가 문제였다.

그곳에서 제천으로 가는 길과 평창으로 가는 길이 분리되기 때문이었다.제천가는 길을 선택할 때까지 근처의 가게주인들에게 수소문을 하느라고 다시 십여분의 시간을 지체하고 말았다.

그래서 북쌍리를 지나고 남한강의 지류인 쌍용천을 건너 멀리 쌍용리의 불빛이 바라보일 때까지 아무런 단서도 포착할 수 없었다.돌격적인 가속이 붙은 자동차는 폭발적인 엔진 소리를 토해내며 사냥개처럼 어둠 속을 질주하고 있었다.

오직 운전에만 몰두해 있는 봉환은 태호가 납치된 까닭조차 묻지 않았다.그러나 조수석에 앉아 있는 식당주인의 등이 식은 땀으로 젖도록 살인적인 속도로 차를 몰아 느릅재를 넘었는데도 겨냥하고 있는 승용차의 뒷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영월에서부터 삼십킬로 가까운 거리를 이를 악물고 달려온 셈이었다.그런데 제천까지는 불과 십킬로 남짓한 여정을 남겨둔 느릅재를 넘어 자곡리의 깊은골 내리막 길을 달려가던 중에 봉환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는 일단 저속으로 차를 몰면서 혼란한 머릿속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다만 앞을 바라보며 달리는 일에만 몰두했던 나머지 호선과 느릅재의 휴게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대로 지나친 것이었다.주저하던 그는 포전리란 작은 마을 앞길에서 지나온 방향으로 차를 돌려버렸다.

만에 하나라도 자신의 짐작이 빗나가버린다면 영영 태호를 놓치게 될지도 모를 도박이었다.일단 차를 돌려 세운 봉환은 속도를 낮추며 조수석을 바라보았다.긴장해서 눈뿌리가 아프도록 앞만 주시하고 있던 식당주인이 낌새를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경황중에 무엇을 놓치고 지나치고 말았다는 것을 그도 알아차렸다는 신호였다.일단 작정을 바꾼 바에는 달려올 때처럼 고속으로 차를 몰 필요는 없었다.봉환은 사물함을 열고 장갑을 꺼내 꼈다.그는 마주 달려오는 그 흰색 승용차를 발견하면 한길 가운데다 차를 세우고 가로막을 각오까지 갖고 있었다.

봉환은 긴장된 가운데서도 어쩐 셈인지 자신감에 차 있었다.포전리에서 느릅재휴게소까지는 불과 2킬로의 거리였다.바로 그 휴게소 주차장에서 세워둔 흰색 승용차 한 대를 발견했다. 가던 길을 되돌아왔던 봉환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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