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투명성 요구한 자격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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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상장 (上場) 회사들은 지난 2, 3월 사외이사와 감사를 선임하느라 난리를 떨었다.김대중 (金大中) 대통령과 30대 기업 대표간 약속에 따라 증권거래소가 사외이사를 선임하지 않으면 상장을 폐지하겠다며 사외이사 선임을 의무화하고, 사외감사 선임을 권고했기 때문이다.

이후 동양그룹을 시작으로 여러기업들은 앞다퉈 사외이사와 감사를 선임했다.한꺼번에 전문성 있고 중립적인 '감시자' 들을 구하려다 보니 회계나 법률.국제금융 분야의 한정된 인력들이 동이 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가운데 일부 회사가 전문성이 떨어지는 인물을 사외이사.감사로 선임하자 증권거래소는 실태파악에 나섰고, 자격 없는 사람을 선임한 상장사는 임시주총을 열어 교체토록 권하겠다고까지 했다.그렇다면 이같은 투명성을 주도하고 기업에 요구한 정부 자신은 어떨까. 이미 상당수 산하기관 장 (長)에 여권 출신 정치인들이 줄줄이 임명됐다.

그러나 선임배경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얼마 전부터는 이들 정부 산하기관의 현 이사와 감사를 국민회의와 자민련 출신 인사들로 교체하려는 움직임이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진다.노른자위 산하기관으로 내려가는 당료들과 원외 지구당 위원장들의 경합도 치열하다.

거론되는 일부 여권인사들은 오랜 정당생활을 거쳤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검증을 받았다고 할 수 있고, 장점도 두루 가지고 있다.하지만 정작 맡게 될 산하기관의 이사와 감사로 적합하냐에는 여권내 인사들마저 고개를 갸우뚱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엔 안태전 자민련 기조실장이 성업공사 감사로 임명됐다.성업공사의 한 직원은 "넘쳐나는 부동산 매물 처리를 위해 회계와 국제금융시장에 대한 안목이 있는 분을 기다렸는데…" 라며 말끝을 흐렸다.

서울신문 등의 정실 (情實) 인사까지 겹친 가운데 일부 기관장에 대해선 "아무리 칼자루를 잡았기로서니" 하는 탄식도 나온다.

새 정부의 국정과제를 가다듬은 대통령직인수위나 감사원.기획예산위는 한결같이 '작고 강력한 국민의 정부' 를 위해선 5백개가 훨씬 넘는 정부 산하기관 정비가 최우선 과제라고 천명했다.그러나 비전문적인 인사를 낙하산으로 내려보내 놓고서 산하기관의 경영 효율화를 기대하긴 어려운 일이 아닐까. "정부, 당신네부터 먼저 투명성을 제고해라" 는 민간의 충고가 여권에 전달됐으면 한다.

이상렬<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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