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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래 원내대표의 ‘대안’을 보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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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1998년 1월 대통령 취임을 앞둔 DJ(김대중)가 이강래 당시 대선 기획특보를 청와대 정무수석에 내정하자, 동교동계 측근들은 펄펄 뛰었다. 견디다 못한 DJ는 문희상 대선 특보단장(현 국회부의장)을 정무수석에 임명하고, 이강래 특보에겐 국정원 기조실장을 맡겼다. 하지만 석 달 만에 DJ는 두 사람의 자리를 맞바꾼다. 이강래는 사상 최연소인 45세에 청와대 정무수석에 오른다.

이강래는 DJ 집권을 성사시킨 일등공신 중 한 명이었다. 1990년대 초 평민당 정책위원으로 DJ와 인연을 맺은 그는 96년 ‘대선필승전략’이란 문건을 작성했다. “호남에 고립된 현재 구도로는 1년 뒤 대선은 필패다. 충청권과 결합해 수도권 지지를 끌어내지 않으면 길이 없다.” ‘유신본당’을 자처하는 김종필(JP) 자민련 총재와 연대해 정권을 잡는다는 ‘DJP 연합’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유일 선명야당’을 자부해온 국민회의 사람들의 충격은 컸다. 그러나 JP와의 연합이 설득력과 현실성을 갖췄다고 판단한 DJ는 이강래의 구상을 받아들인다. 이듬해 DJ는 건국 이래 첫 수평적 정권교체에 성공한다.

정무수석이 된 이강래는 또 한번 도박을 시도한다. 야인이 된 YS(김영삼)와 한나라당 내 상도동계를 끌어안아 여소야대의 취약한 정권구도를 돌파한다는 ‘범민주대연합’론에 앞장선 것이다. YS 측이 조건으로 내건 아들 현철씨(당시 구속 중)의 석방 문제가 벽에 부닥치면서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적군 가운데 타협 가능한 지점·세력을 집어내 정치판의 차원을 바꾸는 전략통의 면모를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가 됐다.

그 이강래(3선·전북 남원-순창)가 지난달 민주당 2기 원내대표에 당선됐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쨍’ 하고 부딪칠 일이 많아질 것”이라며 긴장했다. 이 원내대표는 ‘모범생’ 소리를 들어온 온건 성향의 전임자 원혜영과는 다르다. 그의 취임 일성은 “한나라당은 MB악법을 자진 철회하라”였다. 그가 경선에 출마하며 내건 슬로건도 ‘강한 야당’이었다.

하지만 눈여겨볼 건 그가 ‘강한 야당’ 앞에 ‘대안 있는’이란 전제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원내대표는 6월 국회에서 한나라당과 벌일 입법전쟁만큼이나 9월 정기국회에 내놓을 ‘민주당표’ 법안 준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고 측근들은 전한다. 국민의 3대 현안인 교육·복지·노동에서 실현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입법전쟁에서 아무리 선방해도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 때문이라고 한다.

이 원내대표의 어깨는 무겁다. 84석으로 170석 거대여당에 맞서야 한다. 정동영 의원 복당 논란 등 당내에도 뇌관이 산적해 있다. 점거농성·장외집회 등 극한투쟁에 의존하고 싶은 욕구가 생길 만도 하다. 그러나 싸움 속에서 대화의 여지를 찾아내고, 적군이건 아군이건 강경파를 설득해 타협을 끌어낼 때 참된 정치가 꽃피는 법이다. 민주당 지도부에 등장한 ‘꾀주머니’(이강래의 별명)에 기대를 거는 이유다.

강찬호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