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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짓가랑이보다 치맛자락을 잡아라

중앙일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군주가 외척(外戚)을 가까이하고 신임하면 반드시 권력을 위임하게 되고, 외척이 권력을 가지면 반드시 은총을 믿고 공의와 어긋나는 짓을 합니다. 자기에게 아부하는 사람을 쓰고 의견이 다른 사람을 쫓아내며, 생사여탈권을 손에 쥐므로 아무도 그 뜻을 거역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실권이 은밀히 그에게 옮겨져도 군주는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미 재화(災禍)가 일어난 뒤에는 깨달아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고금의 공통된 걱정입니다….”

연산군 8년(1502) 12월, 아직 건실한 청년 군주였던 연산군이 경연 자리에서 외척을 기용하는 폐단을 묻자 영사(領事) 이극균이 대답한 말이다. 외척이란 대비·왕비·세자빈의 친정 식구들, 즉 왕의 처가 사람들이다. 이극균의 “고금의 공통된 걱정”이라는 말마따나 중국이든 조선이든 유교가 정치의 중심 이념이던 곳에서는 항상 “외척을 주의해야 한다”는 말이 “간신을 주의해야 한다”는 말 못지않게 나돌았다. 그러면 왜 외척이 그토록 문제인가?

먼저 왕의 입장에서 외척은 편하다. 누구나 엄마 손잡고 외갓집에 가면 “우리 강아지 왔구나” 하며 맛있는 것도 주고 용돈도 쥐여 주던 외할아버지·외할머니의 기억이 있으리라. 왕의 경우에는 특별히 더 편할 수밖에 없다. 친가 쪽 사람들, 즉 ‘왕실 어르신’과 달리 그들은 ‘아랫사람’이기 때문이다. 부왕이나 대비는 자식으로서의 효와 신하로서의 충을 바쳐야 하는 어려운 대상이지만, 외척은 인간적으로나 서열로나 편하게 대해도 좋다. 더구나 세자나 왕자는 궁궐 밖에서 지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때 주로 머무는 곳이 외갓집이었다.

자연히 인간적인 정이 새록새록 쌓인다. 왕실 어른들이나 신하들과는 감히 의논하지 못할 일도 의논할 수 있게 된다. 양녕대군의 비행을 도운 사람도 장인인 김한로였고, 홍봉한은 사위인 사도세자의 고민을 들어 주는 유일한 상대였다.

그렇게 외척, 특히 국구(國舅·왕의 장인)에 대한 왕의 신임이 두텁다 보니 그토록 외척을 경계하는 말이 많았음에도 조선 후기에는 국구가 영의정이나 호위대장이 되어 사위인 왕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이 나중에는 패턴이 되면서 하나의 가문에서 계속해 왕비를 배출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움켜잡았으니, 조선 말기의 세도정치가 바로 그것이다.

또 신하의 입장에서 외척은 특별한 존재다. 왕의 신임을 받을 뿐 아니라 다른 신하들은 집무 시간이 끝나면 모두 퇴궐해야 하지만 외척은 왕의 곁에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심복’을 남겨 놓는다. 자신의 딸이거나 누이인 왕비를! 그러므로 왕비를 통해 왕을 움직이거나, 궁궐 깊숙한 곳에서 뭔가 일을 꾸미거나 할 수 있다. 만약 왕의 나이가 어려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대비와 연결된 외척의 손에 국권이 통째로 넘어갈 수도 있다.

이러다 보니 ‘천리마 꼬리에 붙은 파리’처럼 어쩌다가 줄을 잘 서서 입신출세한 간신들도 외척이 되려고 갖은 애를 썼다. 공신 또는 총신으로서 왕의 총애는 잠깐일 수 있다. 더구나 왕이 죽고 나면 하루아침에 끈 떨어진 연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권력을 대대로 연장하기 위해서라도 외척이 되어야 했다.

이 점에서 가장 성공했던 사람은 한명회였다. 그는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에게는 줄을 대지 못했는데, 그가 ‘다행히도’ 일찍 병사했다. 그 다음으로 세자가 된 사람은 예종. 한명회는 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딸을 세자빈으로 들여보낸다. 하지만 그녀는 그만 몇 달 만에 병사하고 만다. 예종은 세조를 이어 왕이 되더니, 새로 중전을 얻어서 그런지 한때의 장인에게 자못 까칠했다. 이대로라면 한명회의 하늘을 찌를 듯하던 세도도 끝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예종 역시 1년여 만에 숨을 거둔다.

그 다음 왕이 될 사람으로는 예종의 원자가 적합했지만, 한명회는 죽은 의경세자의 아들, 그것도 맏아들인 월산대군이 아니라 둘째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혔다(성종이다). 누가 봐도 자을산군에게 자신의 막내딸을 시집 보냈다는 점이 이유였다. 이렇게 한명회는 조선왕조에 둘도 없는 ‘국구 두 번’을 하면서 그 후로도 오랫동안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한명회보다 더 운이 좋았던 사람은 윤원형이었다. 그는 누이 문정왕후가 중종의 왕비가 되면서 일약 나는 새도 떨어뜨릴 세도를 쥐었다. 사실 문정왕후의 차례는 오지 않을 뻔했다. 중종의 첫 번째 부인 단경왕후는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의 딸이라 하여 폐출되었고, 두 번째로 얻은 장경왕후는 후일 인종이 되는 아들을 낳고 죽었기에 세 번째로 맞아들인 사람이 문정왕후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운이 좋았다고 할까. 게다가 중종이 죽고 대를 이은 인종마저 1년을 못 넘기고 죽은 후 보위에 오른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은 겨우 열두 살이라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결정되었다. 그로부터 문정왕후가 죽기까지 20년 동안은 윤원형의, 윤원형에 의한, 윤원형을 위한 조선이었다.

윤원형은 ‘문정왕후 이후’도 준비했다고 한다. 명종의 세자인 순회세자의 세자빈으로 그의 먼 친척인 소녀를 들여보냈는데, 혼약을 맺고 보니 중병 환자였던 것이다. 이를 숨기고 억지로 국구가 되려 했다고 윤원형에 대한 손가락질이 한동안 끊이지 않았다. 어차피 순회세자도 얼마 못 살고 죽었으니 노상 운이 좋던 윤원형으로서는 마지막엔 ‘똥패’를 쥔 셈이었지만.

그처럼 외척이 되어 미래의 권력을 보장받으려다 실패한 경우가 또 있다. 정조 즉위 후 4년 동안 왕의 오른팔로 활약했던 홍국영이다. 그는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갓 서른이었다) 영의정도 우습게 여기는 몸이 되고 보니 언제까지나 이 권력을 맛볼 수 있을지 한편으로 걱정이었다. 그래서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앉혔는데, 빨리 후사를 보아야 하건만 중전에게 태기가 없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하지만 중전이 아직 젊은 데다 누이동생 원빈은 겨우 열세 살이어서 후사 어쩌고 할 깜냥이 아닌지라 누가 봐도 가소로웠다. 그런데 이렇게 미래의 꿈을 걸었던 누이가 몇 달 뒤 세상을 떠나고 만다. 미칠 것처럼 된 홍국영은 중전이 손을 쓴 게 아니냐며 중궁전 나인을 직접 문초하는 등 도에 지나친 행동을 했고, 이 때문에 결국 권력을 잃게 된다.

정치란 늘 공명정대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늘 그러기가 힘든 법이다. 현실정치가 살벌하거나 답답할수록 편하고 비공식적인 관계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최고권력자가 지나치게 그러다 보면 권력이 왜곡되며, 간신이 날뛸 자리가 생기는 것이다.


함규진은 성균관대 정치학 박사로 현재 성균관대 부설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정약용 정치사상의 재조명』『왕의 투쟁』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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