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 자택서 술자리, 權여사와 ‘젊은 연인들’ 듀엣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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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서민대통령.친구같은 대통령.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가고자 했던 길이자,걸었던 길이다.많은 사람들은 이를 탈권위주의라 부른다.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노 전 대통령을 여러차례 동행취재했던 중앙SUNDAY 기자가 노 전대통령의 탈권위주의적인 소탈한 모습을 소개한다.

기자는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크맨’이었다. 가끔씩 그의 ‘맨 얼굴’을 볼 기회가 있었다. ‘취재수첩’ 대신 기억 속에 묻어 뒀던 얘기 중 하나가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담배에 얽힌 사연이다.

“담배 있는가.”
봉하산 부엉이 바위를 떠나기 전의 마지막 소원. 오래전이지만 기자도 같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다.

2002년 9월 4일 저녁. 민주당 노무현 후보 일행과 동행 기자들은 수해지역을 돌고 전북 무주의 한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 건물 옆쪽으로 난 출입구 쪽에서 담배 한 대를 입에 물려는 찰나였다.

“담배 있으면 나도 하나 줘요, 강 기자.”
노무현 후보였다. 그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필했던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은 그의 ‘삼락(三樂)’으로 책, 글쓰기, 그리고 담배를 꼽았다. 그중 담배는 그의 정치역정과 늘 함께했다.

그가 받은 상처나 스트레스와 흡연량은 정확히 비례했다. 2005년 대연정 실패 후 애연가 수준이 됐고, 퇴임 후 봉하마을에 귀향했을 때 ‘까치 담배’ 수준으로 돌아갔다가 서거 전 한 달 동안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다시 손에서 담배를 놓지 못했다고 한다.

하루 종일 수재민을 만나고 난 그의 표정은 내내 어두웠다. 그는 기자가 건넨 ‘디스’ 한 대를 맛있게 피웠다. 조금 기분전환이 되었는지 한 모금을 허공에 내뿜으면서 그가 했던 말이다.

“저기 저 산을 깎아 바다를 메울 수 있을까요?”(노 후보)
“….”(기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던 기자에게 노 후보는 연거푸 기발한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요즘 농촌에 사람이 없다는데, 공무원들 정년퇴직하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법을 하나 만들까요?”(노 후보)
“….”(기자)

그때 “참, 표 떨어지는 소리만 골~라서 하십니다”라며 누군가가 다가왔다. 이강래 의원이었다.

‘대통령 후보에게 저런 식으로도 얘기하는구나’라는 기자의 생각이 무색하게 노무현 후보는 전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그들은 늘 그렇게 지냈기 때문이다.

(‘공무원 귀향법’이 농담만은 아니었다. 이강래 의원이나 기자에게 뜬금없는 얘기로 들리던 노 후보의 구상은 ‘퇴임 후 고향으로 내려간 첫 번째 대통령’으로 현실화됐다.)

정세균 의원도 식당 사장을 데리고 담배 피우는 곳을 찾아왔다. 당시 한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민주당 대표와 원내대표가 돼 있다.

“여기 사장입니다. 근데 이 친구 조폭입니다.”(정세균)
“그래요? (담배 한 모금을 피운 뒤 조금 거만한 표정으로 사장에게) 전국의 조폭표는 모두 내 표지요?”(노무현)

노 후보의 이 말에 대통령 후보를 만나 잠깐 긴장한 표정이던 식당 사장의 얼굴 근육이 풀어지고 있었다.

노 전 대통령에게는 담배가 세 가지 낙 중 하나였겠지만, 기자가 ‘담배 피우는 노무현’에게서 본 것은 ‘탈권위’였다. 그가 표방하고 추구했던 소탈한 모습을 기자는 짧은 순간의 우연한 맞담배를 통해 엿볼 수 있었다.

노 전 대통령 영결식 하루 전인 28일. 기자가 봉하마을에서 만난 조문객들이 가장 그리워하고 있었던 게 바로 ‘밀짚모자 쓴 노무현’이었다. 그들은 그의 소탈함에서 서민에 대한 애정을 보고 있었다.

“인간차별 안 하고 쪼글쪼글한 농민들 손 꽉 잡아 준 정치인이 누가 있습니꺼.”

“국회의원만 해도 너무 높아서 우린 얼굴 한번 못 봤다 아입니꺼.”

“건호는 여의도보다 영등포 애들이랑 친해”
이 무렵 노무현 후보는 자신을 담당했던 각 언론사 기자들을 서울 혜화동 자택으로 초대한 적이 있다.

기자는 또 한번 노 후보의 ‘맨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권양숙 여사가 만든 음식을 딸 정연씨가 날랐고, 폭탄주가 돌았던 자리였다. 잠시 복잡한 현실 정치를 잊은 듯했다.

“내가 속된 노래도 많이 안다”며 예전에 공사판에서 배웠다는 노래를 한 구절 읊은 노 후보는 조금 미흡했던지 “마누라, 이리 와 봐” 하고 손짓을 했다. 그러곤 권양숙 여사와 듀엣으로 ‘젊은 연인들’을 불렀다.

이날 노 후보는 많은 얘기를 쏟아냈다. 아들 건호씨에 대한 말에선 ‘비주류 본능’이 묻어 나왔다. 혜화동에 살기 전 노 전 대통령은 여의도에 살았고, 건호씨도 그곳에서 고교를 나왔다. 노 전 대통령은 건호씨의 친구들을 유심히 관찰했다고 했다.

“여의도 사는 아이들이랑은 잘 안 어울리고 영등포 사는 애들이랑만 주로 다니더라고. 우리 집 문화가 그래서 그런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흐뭇해 보였다.

“지도자 사망해도 흔들림 없는 나라를”
윤태영 전 대변인이 담배와 함께 그의 또 하나의 낙이 ‘책 읽기’라고 했던 것처럼 당시 그의 혜화동 거실 한쪽 벽은 거의 모두 책이었다.

역사책을 비롯한 사회과학 서적이 특히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자들이 “이걸 다 읽으셨느냐”고 묻자 그는 “여기 있는 건 다 읽어 봤다”고 했다.

윤 전 대변인은 “독서가 대통령의 문제의식을 더욱 치열하게 하고 생각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인간의 기원으로부터 유전자, 국가의 기원과 역할, 지나간 우리 역사에 이르기까지 노 전 대통령이 탐구하는 주제와 소재들은 방대했다고 그는 전한다. 대통령 후보 노무현이 고심하면서 사색했던 부분은 역사였던 것 같다. 그는 이날 가장 큰 정적이었던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 이름을 꺼냈다. 그의 이름을 꺼내는 순간 당연히 날 선 비판이 나올 줄 예상했던 기자의 생각은 빗나갔다.

“이회창씨가 대통령이 되든 내가 되든 누가 되더라도 그렇게 역사가 크게 바뀔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역사가 한 개인에 의해 바뀌는 것은 아닌 거 같아요.”

“그러면 왜 노무현을 찍어야 한다고 얘기하실 수 있지요?”라는 질문이 나왔고, 노 후보가 “그렇군요”라고 긍정해 버려 그 얘기는 거기서 중단됐다. 그러나 그는 평소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과 ‘매뉴얼’, 시민의 자각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를 주창해 왔다. 그럴 때마다 1986년 경호원 없이 극장에 갔다가 정신이상자에게 저격당해 죽은 스웨덴의 팔메 전 총리의 예를 들곤 했다.

“총리가 죽어도 계엄 선포하지 않고, 평온하게 장례 치르고, 국가는 흔들림 없이 움직이는 안정된 사회, 그런 사회가 좋은 민주주의 아닌가요.”

말의 취지를 떠나 ‘지도자의 몸은 자기 몸이 아니다’는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 그의 ‘사생관’이 달랐던 것은 분명하다.

윤태영 전 대변인이 노 전 대통령의 세 번째 낙을 글쓰기로 꼽고 있는 것처럼 그가 남긴 글은 많다. 『여보 나 좀 도와줘』 『노무현이 만난 링컨』 같은 저서에서부터 홈페이지인 ‘사람 사는 세상’에 남긴 그의 생각, 심지어 인터넷에 올린 댓글까지. 그러나 마지막 글은 ‘유서’가 되고 말았다.

“미래 정치는 부드러움으로”
88년 청문회 때의 명패 사건, 특정 언론과의 갈등.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노 전 대통령의 모습 중 하나는 ‘분노의 노무현’이다.

최근 오마이뉴스는 노 전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07년 8월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했었던 인터뷰 발언을 공개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후계자로 한명숙씨를 지목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부드러움’에 있었다.

“나 보고 마음대로 지명하라고 하면 한명숙씨요. 앞으로 우리 정치는 상대하고도 대화를 하는 쪽으로 가야 됩니다. 그 점에서 한명숙씨가 탁월한 장점이 있어요.…사람이, 느낌이 부드러워요. 부드러우면 상대방한테 신뢰를 줘요. 나는 (부드러움이) 항상 내 약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만 보면 이상하게 이 사람들(정적)이 ‘나를 뭔가 해코지할 것’이라는 불신감을 갖고 있거든. ‘또 저게 무슨 꼼수를 내나.’ 나는 꼼수를 안 부리는데도.”

그의 ‘분노’를 기억하는 이들은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을 의외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의 시대에서 노 전 대통령이 추구했던 건 부드러운 정치와 그를 통한 타협이었던 것 같다.

실패로 돌아간 대연정 구상도 그중 하나며, 그가 평생 추구했던 지역주의 타파 또한 결국 지향점은 국민통합이었다.

혜화동 자택 만찬에선 군시절 얘기도 꺼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고졸 출신으로 전방에서 ‘박박 기다’ 보니 배운 게 ‘생존술’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머리 굴리는 것이라면 사실 자신 있다”는 말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잔머리를 쓰는 정치는 결코 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실제 그가 여느 정치인들과 달리 이익만을 좇지 않았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손해 보는 정치가 오히려 큰 승부처에서 상황을 늘 뒤바꿔 놓았다. 노무현 정치는 한마디로 ‘반전(反轉)의 정치’였다.

강민석 기자 ms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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