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불란한 조직문화는 위기에 취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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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호 30면

얼마 전 부도가 나서 법정관리 상태에 있는 서울의 한 중견기업은 창업 이후 초고속 성장을 거듭해 한때 코스닥 시장의 최우량 기업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납품하는 회사의 사장이 바뀌면서 납품 물량이 대거 경쟁 기업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회사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 회사가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영업부의 한 대리가 납품회사 실무자를 통해 ‘납품회사가 품질향상과 원가절감을 위해 새로운 거래처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이다. 그는 경쟁 회사가 그 틈을 노리고 있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신현만의 인재경영

그러나 회장은 납품회사 경영진과 오랜 관계를 감안할 때 급격한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낙관하면서 대책 마련을 요청하는 직원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회장은 기술개발이나 원가절감보다 납품회사 경영진과의 관계가 더욱 중요하다고 보고 조직 역량을 총동원해 관계 강화에 주력했다. 회장의 대학 동창과 친인척 등 지인으로 구성된 주요 임직원도 일사불란하게 납품회사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납품회사 사장이 전격 교체됐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일사불란한 조직은 강한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어 기업인이 많이 선호한다. 특히 회사가 원하는 곳에 조직의 역량을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압축적 고속성장’을 꿈꾸는 기업인에겐 가장 매력적인 조직의 모양새다. 이런 조직을 원하는 기업인은 가급적 같은 경험과 정서를 갖고 있는 직원으로 조직을 꾸리려고 한다. 또 연고 채용이나 신입 공채 중심의 인력 선발 시스템을 운영하는 한편 경력자의 영입을 최소화한다. 또 상하관계가 뚜렷한 수직적 조직문화를 정착시키고 ‘우리가 남이가’ 식의 강한 동지의식을 조성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순혈주의 조직은 대개 조직 수장의 결정을 효율적으로 이행하고 관철하는 데 운영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조직엔 의사결정의 합리성보다 집행력과 속도가 중요하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관점과 토론, 이 과정에서 나오는 문제제기는 추진력을 약화하는 비효율적 요소일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개미처럼 일사불란한 기업이 과연 지속 성장할 수 있을까?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때 몰락한 대우는 강한 추진력을 갖고 있는 일사불란한 조직의 상징이었다. 당시 대우에는 유능한 인재가 즐비했다. 특히 김우중 회장을 보좌하는 회장 비서실에는 학력과 경력이 화려한 임직원이 포진해 있었다. 그런데 회사가 코드가 맞는 직원을 뽑다 보니 이들은 학력과 경력 등 성장 배경이 비슷했고 경영철학과 경영방식에 대해서도 이견이 없었다. 이들은 따라서 김 회장이 제시한 정책을 효과적으로 집행하는 데 관심을 가졌을 뿐 정책 자체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같은 목표, 같은 정서, 같은 가치관, 같은 판단 기준을 가졌던 이들에게 경영진의 결정 내용은 언제나 옳았고 토론과 의견 제시는 불필요했다. 대우는 이렇게 일사불란한 조직 운영 시스템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탁월한 속도와 추진력을 토대로 단기간에 급성장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외환위기로 회사 안팎의 상황이 급변하자 임직원은 해법을 찾지 못한 채 총수만 쳐다봐야 하는 답답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결국 총수의 실패가 곧바로 조직의 실패로 이어지면서 대우그룹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나는 만약 대우가 다양한 성향의 직원을 뽑아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시켰다면 그렇게 허둥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의사결정을 할 때 다양한 구성원이 참여하면 다양한 시각으로 문제를 살피기 때문에 위험을 충분히 감안하게 된다. 속도가 느리고 집행력이 다소 약할지 모르지만 위험은 훨씬 줄었을 것이고 위기 상황에서 그렇게 허약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글로벌 기업이 인재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도 이렇게 합리적 의사결정을 통해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펩시콜라나 존슨앤존슨 같은 기업들은 다양성을 회사의 전략적 가치이자 경쟁 기업과 차별화하는 핵심 요소라고 확신한다. 다양성을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달성해야 할 목표로 삼고 있다. 이들은 특히 여러 배경을 가진 다양한 인재를 뽑는 것을 채용의 핵심 원칙으로 정해 놓고 있다. 이 때문에 이 회사에는 몽골 출신의 미국 변호사, 아랍에미리트 출신의 영국 회계사, 러시아 출신의 캐나다 공학박사 등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종교, 그리고 다양한 학력과 경력을 갖고 있는 인재들이 일하고 있다. 이런 회사에는 게이나 레즈비언·트랜스젠더 등이 참여하는 ‘성적 소수자 커뮤니티’의 활동도 활발한데, 회사는 이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물론 조직 안에 배경이나 가치관이 다른 사람이 너무 많으면 의사소통이 어렵고 업무의 효율성이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직원이 너무 같은 가치, 같은 경험, 같은 정서를 갖고 있으면 획일적 사고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더 큰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불편하고 비효율적이고 의사결정 속도가 다소 떨어지더라도 끊임없이 다양한 사람을 영입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이 조직에 안착해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다양한 의견을 내뿜어야 의사결정의 합리성을 얻을 수 있고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인재의 다양성은 기업의 지속적 성장을 위한 필수 요소다. 특히 글로벌 기업을 꿈꾸는 한국 대기업의 경우 다양한 인재를 확보하지 못하면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날 수 없다. 코드가 맞는 직원만 채용하면 기업의 성장은 금방 한계에 부닥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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