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팡질팡 고속철]상.누구의 잘못인가…노태우씨 '재임중 착공' 고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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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단군 이래 최대 역사' 인 경부고속철도사업이 '단군 이래 최대 골칫거리' 가 돼버렸다.감사 결과 흑자운영은 커녕 재원 마련이나 부채 상환도 막연하다는 고속철도사업은 당초 5조8천억여원의 사업비가 약 4배로 불었고, 서울~부산간 개통시기는 추정불능 상태다.고속철도사업 전면 재검토가 시작되는 8일 관계부처 장관회의에 맞춰 고속철도사업의 문제점과 대안을 점검한다.

87년 12월 민정당 노태우 (盧泰愚) 후보는 경부고속철도사업 추진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다.당선 후 盧대통령은 89년 7월 '고속전철추진위원회' 를 발족, 본격 추진의 시동을 걸었다.

84년 국토개발연구원의 '경부축 장기 교통투자 및 고속철도 건설 타당성 조사' 후 학계에서 논의되던 고속철도가 잉태된 순간이었다.

◇ 사업추진 = " '내가 없으면 추진이 안된다.

내가 있을 때 공사 착공과 차량 선정을 마치라' 는 게 통치자의 뜻이었습니다.올림픽 성공에 고무됐던 盧대통령은 고속철도를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의 경부고속도로에 견줄만한 업적으로 여겼던 거지요. " 6공 초기 청와대비서관을 지낸 A씨의 말이다.

정책결정 과정에 제대로 된 제동장치를 갖추지 못했던 6공 정부는 89년 9월 철도청과 교통개발연구원에 기술조사 용역을 발주한지 1년도 못돼 90년 6월 김창식 (金昶植) 교통부장관을 통해 노선.통과역.기술 등 기본계획을 발표했다."일본기술에서 벗어나보자는 철도맨들의 분위기도 사업을 부추겼습니다.

당시 철도청은 고속철도 운행 시속이 3백㎞는 넘어야 한다는 생각을 밀어붙였지요. 88년 12월 철도청장에 오른 김하경 (金夏經) 당시 청장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고속철도를 만들어야 한다' 는 친필 부기를 기본게획 결재서류에 남길 정도였습니다." 의욕과 소신이 어우러진 고속철도사업은 노건일 (盧健一) 교통부장관.김종구 (金鍾球) 고속철도공단이사장 재임 당시인 92년 6월 시험구간 공사 착공으로 이어지며 꼬였다고 기본계획에 참여했던 철도청 간부는 회고한다.

차량 선정보다 1년반 앞선 공사란 결국 설계도 없이 터파기를 시작한 꼴이어서 시공~설계변경~재시공의 악순환이 계속됐고, 최저가 입찰방식으로 건설회사를 고르다보니 무경험 업체가 다수 참여해 부실이 속출했다.97년 4월 미국의 안전진단회사 WJE사가 부실공사 판정을 내린 것은 예견된 결과였다.

◇ 노선 및 차량선정 = 90년 6월 김창식 교통부장관은 경주가 포함된 기본노선을 발표했다."당시 용역팀은 33개 노선 대안중 대구~밀양~부산 또는 대구~울산~부산 2개 최적안을 건의했습니다.경주노선도 검토했지만 경제성이 낮아 제외했지요. 그런데 최종 기술보고서에는 '정부방침' 이라며 경주노선으로 바뀌었습니다. " 기술자문을 맡았던 루이스 버저사 맥도널드는 "당시 기술적 노선 선정을 하고 있는 와중에 한국측 파트너들이 갑자기 지도에 자를 대고 직선을 긋기 시작했지요. 이유를 물었더니 '속도가 3백50㎞로 결정됐다.

상부지시다' 라더군요" 라고 증언했다. 기술적 검토보다 정치적 판단과 졸속 추진 의지가 우선했다는 사실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우회노선 37.7㎞ 연장, 9천8백억원의 추가 공사비가 소요되는 경주노선 결정은 결국 96년 6월 화천리계획 결정까지 6년여의 지루한 문화재 보호 공방으로 이어졌고 지금 또다시 대구~부산 노선 직선화 공방을 낳고 있다.

차량도입 계약은 94년 6월에야 체결됐다.91년 8월 차량 선정작업이 시작돼 6차에 걸친 협의가 계속됐지만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시비에 휘말린 6공으로서는 사업자 선정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당시 청와대 비서관 출신 B씨의 회고. "盧대통령은 재임기간중 차량을 선정하겠다는 입장이었습니다.눈덩이처럼 불어난 공사비를 줄이기 위해 최적의 금융조건을 제안한 TGV 선정이 불가피했습니다만 정치자금 수수 시비가 두려워 결정이 늦어진 겁니다."

◇ 사업비 = 기본계획을 토대로 91년 2월 총 공사비 5조8천억원이 계산됐다.임인택 (林寅澤) 교통부장관 시절 마무리된 '경부고속전철 기술조사' 결과였다.

"기술과 경험이 모자란데다 시간까지 촉박해 기존 철도 건설비의 1백30~1백50%를 기준으로 노반공사비를 계산하는 등 웃지 못할 주먹구구식 계산법이 속출했습니다." 교통개발연구원이 경제성 분석과 용역 총괄을 맡았고, 유신설계공단.철도기술협력협회.현대정공.대우중공업.루이스 버저사 등이 각각 토목기술.차량.기술조사 부문을 맡아 작성한 보고서에 관여했던 실무책임자의 실토다.

"당시 사업비는 기술적 계산이라기보다 정치적 계산이었지요. 부끄럽지만 애초 사업비 수정을 전제로 발표된 수치라고 봐도 틀리지 않습니다." 결국 김영삼 (金泳三) 정부가 출범한 뒤인 93년 6월 공사비는 10조7천4백억원으로 수정됐다."10조원대를 지켜야 했습니다.

기술적으로는 14조원대로 나왔는데 사업 축소를 통해 사업비를 줄였던 거지요. 서울구간 지하화 대신 남서울역 건설로 대치해 사업비를 축소시켰다가 이번 감사원 감사에서 적발되지 않았습니까. 당시에도 알고 있었던 문제지요. " 건교부 실무자로 1차 수정작업에 참여했던 관계자는 지상 - 지하화 논쟁을 촉발한 대전 18.5㎞구간 및 대구 35.3㎞구간 지상화 계획도 10조원대를 맞추려 공사비 4천3백36억원을 줄이려는 노력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지상화 계획은 결국 2년반만인 95년 4월 대전.대구역 지하건설로 되돌아갔고 총사업비는 다시 97년 9월 17조6천2백94억원으로 98년 4월 22조2백92억원으로 늘어난다.지상 - 지하화 논쟁을 지켜본 고속철도공단 임원은 "당초 지하화 계획은 기존 철도용지를 활용해 고속철도.일반철도.지하철.버스의 입체 환승역을 건설한다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어차피 지상화는 불가능했던 것입니다.사업비 논쟁으로 기본개념이 사라져버린 것이지요" 라고 아쉬워했다.

음성직 교통전문위원.권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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