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일본에 거는 기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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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아시아 금융위기의 진원지가 일본이라는 일본책임론은 복합적인 위기의 원인을 단순화하는 감이 있다.그러나 위기가 일어난 경위를 보면 아시아 경제의 70%를 차지하는 일본이 위기를 해결하는 데 미국의 주도에 끌려만 다녀서는 경제대국의 책임회피라는 비난을 받을 만하다.

아시아 금융위기의 강줄기를 따라 일본쪽 상류로 올라가면 두개의 샘을 만난다.엔화가치의 하락과 초저금리 정책이다.

93년 한때 달러당 79엔까지 올랐던 엔화는 97년 1백30엔으로 떨어졌다.엔저 (低) 는 아시아 국가들의 수출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아시아 통화들의 투매 (投賣) 를 촉발했다.

한편 초저금리의 엔화에 착안한 미국 투자금융회사들은 신용을 바탕으로 2% 정도의 금리로 엔화를 빌려 아시아 금융회사들에 5%나 6%로 빌려주고, 아시아 금융회사들은 그렇게 빌린 엔화자금을 15% 이상의 금리로 자기나라 기업들에 융자했다.

태국에서 거품이 터지자 일본은 서둘러 엔화자금 회수에 나섰다.인도네시아와 한국의 위기도 같은 경위로 일어났다.

망둥이가 뛰면 잉어도 뛴다.97년 6월 현재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9개국에 2천7백14억달러 규모의 엔화를 빌려주고 있던 일본 은행들도 빚독촉에 나섰다.

설상가상으로 97년 4월에는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郎) 정부가 재정적자를 줄일 목적으로 소비세를 3%에서 5%로 올리는 실수를 했다.소비세 2%포인트 인상으로 일본 국민들의 부담이 9조엔 정도 늘어 소비심리가 얼어붙어 버렸다.

내수 (內需)가 더욱 위축돼 일본의 불황이 깊어진 것은 말할 것 없고 아시아 국가들의 일본에 대한 수출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런 배경에서 미국은 일본에 내수를 자극하는 특단의 조치와 금융개혁을 강도 높게 요구했다.미국은 아시아 금융위기 해결이라는 편리한 명분을 앞세워 일본 상품시장과 금융시장의 동시개방을 노렸다.

4월초 금융시장이 완전히 자유화돼 1천2백조엔 (10조달러)에 달하는 일본의 개인저축 일부가 미국계 은행을 거쳐 월 스트리트로 흘러들어가 뉴욕 투자금융회사들을 통해 해외의 투자대상을 찾아나설 수 있다.

하시모토정부는 한동안 미국의 압력에 저항했다.그도 그럴 것이 하시모토정부는 현재 국내총생산 (GDP) 의 5%인 재정적자를 2003년까지 3% 이내로 줄인다는 재정구조개혁법을 중요한 업적으로 내세워왔다.종합경기대책을 채택한다는 것은 하시모토의 노선이 건전재정에서 경기부양으로 U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유럽까지 가세한 미국의 압력에 계속 저항하면 미.일 관계가 위태로워진다.그렇게 해서 지난달말 나온 것이 16조엔 (1천2백45억달러) 규모의 종합경기대책이다.

내수확대를 위한 소득세 인하 계획도 밝혔다.미국은 일본에 구체적으로 10조엔의 감세 (減稅) 를 빠른 시일 안에 시행하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일본정부는 감세 실시의 시기와 규모는 밝히지 않고 있다.

미국은 일본이 런던 아시아.유럽 정상회의 (ASEM) 와 5월 중순 버밍엄의 주요국 수뇌회의까지 시간을 끌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감세계획을 슬그머니 백지화하려는 속셈일지도 모른다고 경계한다.

하시모토는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경제정책의 기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면 원칙과 전략없는 정책만 남발한다는 비판을 받고, 어쩌면 자민당 안에서 그의 리더십에 대한 심각한 반발이 있을지도 모른다.당내 쿠데타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이건 정치적인 모험이다.

그렇다고 최소한의 경기부양책만 쓰고, 아시아 금융위기 해결에도 지금같이 미국 주도에 끌려다닌다면 일본은 아시아에서 그 경제력에 걸맞은 입지를 확보할 호기를 놓친다.이건 외교적인 모험이다.

어느쪽이 더 일본다운 노선인가는 전적으로 일본이 판단할 일이지만 세계는 일본의 선택이 5년째의 헤이세이 (平成) 불황과 아시아 금융위기를 동시에 해결하는 쪽으로 내려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김영희 〈국제문제 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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