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김수남 '슬라이드 강좌'의 매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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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직접 가볼 수 없는 현장을 대신하는 수단으로 강단에서 이용되던 슬라이드가 이제는 문화매체의 한 형태로 급속히 퍼지고 있다.현장의 대체물이 아니라 현장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각도에서 문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전해주는 사회문화운동의 하나로 슬라이드 강좌가 진행되고 있는 것. 최근에는 미술사학과나 건축과.인류학과 등 대학 강단뿐 아니라 여러 기업체와 백화점 문화센터 등에도 슬라이드 강좌가 개설돼 그야말로 각계각층 모두에게 가장 손쉽게 문화체험 기회를 주고 있다.

바로 이런 붐의 대표적이면서 동시에 대조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영남대 유홍준 (兪弘濬.49) 교수와 사진작가 김수남 (金秀男.49) 씨를 들 수 있다.

잘 알려진대로 兪교수는 뻔히 눈 뜨고도 알아볼 수 없었던 우리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치적 문제 때문에 남쪽의 문화유산에 머물러있던 그가 최근 북한까지 영역을 넓혀 이제는 한반도를 두루 포괄해 폭을 넓히고 있다.兪교수는 85년 신촌에서 '젊은이를 위한 미술사 강좌' 로 첫 슬라이드 강의를 시작했다.

미술사를 보다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시작한 이 강의 수강생들이 주축이 돼 문화유산답사회가 구성됐고 이는 다시 그의 베스트셀러 '문화유산 답사기' 로 이어졌다.강좌가 발단이 돼 답사가 이루어진 것과 반대로 이제는 답사기로 유명세를 타고 여기저기 강좌에 나서는 단골 인기강사가 됐다.

우리 고건축물.불상.석물.장승 등 5만여점의 소장 슬라이드 가운데 수강생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것은 '운주사 불상' 이다.

경주 석굴암의 근엄한 통일신라 불상과 달리 마치 고려 호족들의 자화상인듯한 우락부락한 모습의 이 불상이 개성을 중시하는 요즘의 미감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兪교수는 "남쪽이든 북쪽이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이 시대의 미감과 통하는 아름다움이기 때문에 현대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미술사를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며 "내 강좌가 인기를 끄는 것은 바로 이런 부분을 끄집어 내기 때문일 것" 이라고 말한다.

兪교수가 한반도를 크게 50여 강좌로 다루고 있다면 金씨는 지난 86년 '한국의 굿' 등 국내 테마를 마감한 이후 아시아 오지 (奧地) 를 주무대로 한 슬라이드 강좌로 명성을 얻고 있다.비행기 기내에서 만나게 되는 화려한 민속의상을 입은 각 소수민족들의 소박한 모습을 담은 사진에서부터 골드 트라이앵글의 마약왕 쿤사의 얼굴표정에 이르기까지 그는 10만여점에 달하는 슬라이드를 소장하고 있다.

작업실을 겸하고 있는 그의 집 2층 거실 3면에 놓인 책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슬라이드집 속에는 언제 가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쉽게 볼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 특별한 축제나 제의 등 시간을 맞춰서 가야 볼 수 있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는 '문명 속의 오지' 일본 오키나와를 비롯해 미얀마와 태국.인도네시아 등 지금까지 10년 이상 모두 아시아 11개국을 돌아다녔다.

1년에 절반 가까이를 한국을 벗어나 보내면서도 홍콩이나 싱가포르 같은 서구문명의 바람이 분 곳에는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

10여년 동안 슬라이드 강좌를 진행해온 金씨는 "초기엔 못 가본 곳에 대한 호기심에서 슬라이드 강좌를 찾기 시작했다면 이제는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찾는 사람이 많다" 고 말한다.

金씨는 비슷한 지역이라 해도 종족에 따라 각기 다른 문화와 전통을 갖고 있는 이 지역들을 관통하는 인생살이, 즉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겪어야 할 통과의례에 가장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어디에 가든 제의 (祭儀)에는 빠지지 않는다.

'축제' 와 '결혼' '탈' 등 테마별로 나눈 10여개 강좌 이외에 20여개 지역으로 나눈 강좌나 개론 형식으로 다양한 문화를 섞어놓은 강좌에는 성인식과 결혼, 장례등 통과의례가 포함돼있다.

수강생들이 가장 관심을 보이는 부분은 성 (性) 문제. 좀더 나아가 여성과 남성의 역할에 호기심을 나타낸다.

태국 북부 아카족 남자는 부인을 얻어 늘어난 노동력으로 재산을 늘리면 부인을 셋까지 얻는다.

그리고 나면 남편은 일에서 아예 손을 떼고 아편에 탐닉한다.반면 남자가 결혼이나 그밖의 중요한 의사결정에서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모계사회도 있다.

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테마는 바로 이것이라고. 바로 이렇게 우리 것, 혹은 아시아 문화를 왜곡이나 폄하없이 보여주는 것이 유홍준.김수남 슬라이드 강좌의 매력이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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