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달은 모방사건으로 본 문제점]TV 범죄재연 '위험수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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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TV 화면에 범죄가 넘치고 있다.범죄 재연프로가 인기를 얻으면서 각 방송사들이 경쟁적으로 이 기법을 도입한 프로를 방영하고 있기 때문. 5년 전 시작한 장수프로 MBC '경찰청 사람들' 과 지난 2월 신설된 KBS '공개수배 사건 25시' 등 전형적인 프로는 물론, 메인 뉴스 시간에까지 각종 범죄 재연화면이 등장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프로들이 '모방범죄.선정성' 의 위험을 높이고 있고, 실제로 청소년 모방범죄로 이어지고 있는 점이다.

얼마전 미국 아칸소주에서는 11.13세 아이들이 학교에서 총기를 난사, 여교사와 학생들이 숨지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이 사건의 원인 중 하나로 '범죄를 자세히 보여준 TV 프로' 를 지적한 언론 보도가 뒤따랐다.

우리 나라에서도 같은 원인의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달 21일 경북 영주시에선 14세 중학교 중퇴생이 구멍가게에 칼을 들고 들어가 여주인을 협박하고 돈을 갈취했다.

범인은 범행 후 봉화경찰서의 불심검문으로 붙들렸는데, 사건을 조사한 수사진은 어이 없는 진술을 받아냈다.한 수사관의 말. "여자의 입에 테이프를 붙이고 전깃줄로 손.발을 결박하는 등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치밀한 범행을 했습니다.

물어보니 '경찰청 사람들' 에서 보고 배웠다고 말하더군요. " 이 경찰서에서도 얼마전 '경찰청…' 에 출연한 적이 있어 수사진의 충격은 더했다.

서울지방경찰청 고위간부도 "특히 요즘엔 범인들이 지문을 지우는 등 수사에 어려움을 준다" 고 밝혔다.

이에 대해 프로 제작진은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했다. "범죄 예방을 위한 것입니다.

시청자들에게 '나도 당할 수 있겠구나' 하는 경계심을 일깨워 주는 의도죠. " 그러나 전문가들의 생각은 다르다.

방송위원회 함상규 부장은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보단 오히려 범죄수법을 제공하는 역기능이 크다고 본다" 고 말했다.

모방범죄 못지 않게 지적되는 게 선정성의 문제다.

지난 2월 MBC의 사회교양팀에선 'PD수첩' 을 통해 방송의 문제점을 자성하면서 '선정적인 프로그램 아이템 문제' 를 적시했다.당시 이 프로는 '방송이 거듭나기 위해 스스로 따가운 비판을 했다' 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같은 팀에서 제작 중인 '경찰청…' 의 최근 아이템을 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MBC에서 보낸 홍보자료를 잠깐 옮긴다.

'전문적 제비인 홍순우는 무도학원에서…유부녀인 본숙 또한 그의 먹이가 되고' (24일분) '자신을 의사라고 사칭하며 여자들에게 접근해 정절을 빼앗고' (31일분) . 이런 지적에 대해 두 프로를 맡고 있는 윤혁 사회교양팀장은 "일단 두 프로그램은 성격이 틀린다.

그리고 소재 자체보단 그것이 어떻게 다뤄졌는가가 중요하다고 본다.

시청자들에게 사전에 수법을 알고 조심하라는 차원에서 만든 것" 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이효성 교수는 "제비족이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닌데 예방효과를 얘기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면서 "이는 남성들의 잠재적인 성적욕구를 대리 만족시켜 주면서 시청률을 끌어 올리려는 발상" 이라고 진단했다.

이교수의 주장은 미디어서비스코리아 (MSK)가 분석한 분단위 시청률 조사에서도 입증된다.

성폭행과 노인사기사건을 다룬 '공개수배 사건 25시' (지난달 25일 방영) 의 경우 성폭행 장면에선 20%대의 완만한 상승곡선을 보이던 시청률이 노인사기 순서에선 10%대로 하락한 것. 이런 프로에 강한 반감을 표하는 사람 중엔 다름 아닌 방송사의 PD들도 많다.

KBS의 한 중진급 PD는 "그 어떤 저질 드라마나 쇼도 지나친 범죄재연 프로보단 덜 해롭다고 본다" 며 "같은 직업을 가진 나에겐 이런 것들이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의도로 밖에 안보인다" 고 말한다.

이같이 무수한 문제 지적과 우려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제작진은 "재연을 통해 범죄를 예방하겠다" 는 소신을 거듭 밝혔다.

강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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