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발한 세계일주 레이스 2] 화물선 한진아테네호 타고 태평양 횡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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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급 스카치위스키를 걸고 세계일주 경주를 펼치는 하버드 훈남들의 기상천외한 여행기

『기발한 세계일주 레이스』의 두 주인공은 하버드 대학 동기이자 할리우드 작가인 밸리와 스티브이다. 어느 날 무료한 일상에서 탈출하여 서로 반대쪽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경주를 벌이는 두 훈남 모험가의 이야기는 중앙북스에서 6월 초에 출간한다.


일러스트 ⓒ 김은

롱비치를 출발해 오클렌드와 한국을 거쳐 상하이로

나는 4월 18일 오후 롱비치 항 T선착장에 나와 고도로 기계화된 터미널에서 컨테이너들이 탑재되고 하역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진아테네호는 바다를 항해하는 육중하고 거대한 괴물이었다. 배의 길이가 278미터나 되고 폭도 너무 넓어서 파나마 운하를 통행할 수 없었다. 그 배는 마치 재미라고는 모르는 회계사들과 사시를 하고 보는 엔지니어들이 배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전부 제거해버린 것 같았다.

한진아테네호를 모델로 유화를 그린다거나, 배의 곡선이 어떻게 바람과 파도를 가르고 나아가는지를 시적(詩的)으로 표현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컨테이너 선박을 가당치 않게 여성형으로 지칭하는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그 배는 속이 빈 강철 뼈대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선미(船尾)에서 약 3분의 1쯤 되는 곳에 5층짜리 좁다란 상부 구조물이 있었는데, 그곳이 배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지낼 수 있는 장소였다. 그 외의 부분은 컨테이너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을 뿐, 기본적으로는 평상형 트럭(flatbed truck)과 마찬가지였다. 아마 레고(LEGO) 블록을 가지고도 한진아테네호의 모형을 아주 정확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뒤쪽 전망대 바깥쪽에 걸린 포스터에는 ‘해적 출몰 지역에서는 경계를 게을리하지 마시오.’라는 경고 문구가 써 있었다. 이 문구 아래에는, 어둔 밤 수염을 기른 폭력배 두 명이 비열한 웃음을 띠고 칼을 번뜩이며 갑판으로 기어 올라오고 호리호리한 그들의 동료가 자동 권총을 들고 난간 위를 살금살금 걸어다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들은 앵무새를 데리고 다니고 눈에 안대를 한 그런 해적이 아니라 몸값을 내지 않으면 하루에 하나씩 손가락을 잘라버리는 그런 해적이었다.

알렉스(Alex)가 말했다. “해적은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해적이 제일 많이 출몰하는 소말리아 근처 해역이나 인도네시아 해협 같은 곳으로는 가지 않거든요.”
아마 그리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음 2주 동안 그 나름의 규율을 지키고 그 나름의 위험 요소가 있으며 그 나름의 포스터도 갖춘 낯선 세계에 갇혀 지내야 했다.

한진아테네호의 놀라운 즐거움들

나는 하루 종일 바다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눈이 아플 정도로 책을 많이 읽어서 글자를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한진아테네호에서 보내는 14일이, 지적 수준이 밸리 정도밖에 안 되는 유치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나 진실로 지루하다는 것을 증명하기로 결심했다. 그런 사람들은 전자 시대(electronic age)의 불협화음 때문에 감수성이 망가져 화면을 스쳐가는 그림과 시끄러운 소리로 끊임없이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조금만 더 깊이 파고들면 화물선을 타고 다니는 여행은 놀라운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 우정: 항해에 나선 첫날 밤 나는 경계를 서고 있는 필리핀 선원 한 명을 발견했다. 그의 이름은 글렌(Glen)이었다. 악수를 나누고 나니 어색한 정적이 이어졌다. 부분적으로는 글렌의 영어 실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탓도 있었고, 매사추세츠 주의 작은 마을 니덤(Needham)에서는 거의 타갈로그어를 주워들은 적이 없었던 탓도 있었다.
게다가 우리는 함께 나눌 이야기도 별로 없었다. 나는 우스꽝스러운 내기를 하는 바람에 배에 타고 있었고, 글렌은 갑판을 청소해서 버는 연봉 6,000달러로 필리핀에 있는 가족 전체를 부양하기 위해 배를 타고 있었다. 나는 들뜨고 불안한 상태였고 글렌은 지루하고 피곤해 보였다. 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책들에서 바다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고 글렌은 15살 때부터 매년 9달 연속으로 배를 타며 살아왔다.

일러스트 ⓒ 김은

◇ 대양 바라보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적어도 하루에 한 시간은 그저 바다를 바라보면서 보냈다. 계속 변화하는 바다의 색을 보면서 나는 크레욜라(Crayola) 크레용에 붙은 색깔 이름들을 떠올렸다. 어떤 날은 젖은 칠판처럼 광택 있는 검은색이었다가 어떤 날은 베이컨 통조림에 채워져 있는 유지(油脂) 같은 회색을 띠었다. 또 어떤 날엔 연어 껍질처럼 거의 투명한 기름 색깔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크고 잘 익은 블루베리를 짜낸 듯한 푸른색이었다.

◇ 배에 탄 유일한 여성 꼬시기: 리이젤이 선교에서 교대근무를 하는 시간이 새벽 2시에서 6시 사이였기 때문에 이 여성을 꼬시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화물선에서 여자를 꼬시는 일은 누가 더 멋진 경험을 했는지 겨루는 경쟁에서 승리를 보장할 만했다. 그래서 매일 밤 몇 분씩, 반수면 상태로 몸을 일으켜 선교에 올라가서 날짜 변경선에 대한 재미없는 농담을 하며 시시덕거리다가 다시 침대로 돌아와 잠을 자는 일을 겨우겨우 지탱해나갔다. 과연 내 침대 바로 아래로 2마일을 내려가면 3미터나 되는 대게가 부상당한 거대한 해님불가사리를 갈갈이 찢고 있는지 궁금해하며 잠이 들곤 했다.

◇ 한국 상륙: 이번 경주에서 내가 처음으로 방문한 나라는 대한민국이었다. 거기서 우리는 부산항에 정박하여 화물을 싣고 부렸다. 부산은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대도시로, 점점이 잉크로 얼룩진 듯한 산들이 있고 굽은 손가락 모양의 항구가 자리 잡은 한반도 남동쪽 귀퉁이에 있는 도시다. 한국전쟁 중 한때 부산은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버틴 유일한 지역이었다. 마이애미만 남기고 미국 전역이 캐나다에게 잡아먹히는 상황을 상상해보면 될 것이다.

선장과 리이젤이 뭍에 내리는데 나도 같이 가자고 초대했다. 선장은 리이젤과 내가 대화를 나누도록 계속 부추겼다. 선장은 데이트에 보호자로 따라나선 것처럼 우리를 이끌고 산에 올라 아름다운 불교사찰인 범어사에 데리고 갔다.

다시 한번 내가 가지고 있던 뱃사람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졌다. 선장은 신라시대 불교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춘 전문가 같았다. 그는 샘물을 한 모금 깊이 들이키더니, 길을 재촉하여 나와 리이젤을 이끌고 숲이 우거진 산속으로 힘차게 행군해갔다. 리이젤과 나는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함께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시내로 돌아가 엄청나게 큰 부산의 어시장으로 들어갔다. 어시장에서는 나이든 아주머니들이 해삼이 든 큰 대야를 돌보면서 대게를 가두어둔 큰 통에 얼음과 콜라를 넣어 차게 식히고 있었다. 그날 밤 선장은 항구가 바라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승무원들과 나를 위해 한국식 연회를 베풀었다. 열심히 하이트 맥주를 주문해서 마셨고 아마 의도적이었겠지만 리이젤 바로 옆에 나를 앉게 했다. 하지만 우리의 로맨스는 생겨나지 않았다. 그녀가 수다를 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리이젤이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의 인종 통계에 대해 이야기한 내용은 내가 실제로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꺼이 믿어줄 수도 있고, 인종차별이라기보다는 번역 과정에서 왜곡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화물선 여행에서 로맨스를 찾으려는 내 희망은 상당히 희미해졌다.

※ '기발한 세계일주 레이스' 연재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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