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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 왔다 봉사하게 됐다” 쓰레기 줍고 리본 나눠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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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25일 오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임시 분향소가 마련된 서울 정동 덕수궁 대한문 앞에는 조문객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조문객들은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500m 넘게 정동극장까지 늘어섰다. 뜨거운 햇볕을 맞으며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지만 짜증을 내거나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은 없었다. 시민들은 숙연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차례를 기다렸다.

조문 행렬에 서 있던 대학생 박현호(25)씨는 “분향소 주변에서 시끄럽게 하거나 구호를 외치는 것은 오히려 고인을 욕보이는 일”이라며 “시위를 꼭 해야 한다면 장례 이후라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시민들도 “노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비는 것이 우선”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전날 밤 ‘민주세대 386’이라고 쓰인 깃발을 들고 나타난 100여 명이 한때 시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시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들은 “독재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서소문로 입구 도로 2개 차로를 점거했다. 이 모습을 보고 시민 300여 명이 모여들었으나 시위에 가담하는 사람은 없었다. 시민들은 “상중인데 이러면 되겠느냐”며 이들에게 자제해 줄 것을 요구했다.

국화와 리본 나눠주기, 쓰레기 줍기 등을 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들도 질서를 강조하고 있다. 자원봉사자들은 임시분향소를 설치한 인터넷 카페 회원과 일반 시민이 주축이다. 이들의 노력으로 분향소 주변은 휴지나 담배꽁초 등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게 정리돼 있다. 천광민(27)씨는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며 “여기에 있는 어느 누구도 폭력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근조’ 리본을 나눠주던 임나경(26·여)씨는 “조문하러 왔다가 ‘일손이 모자란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여하게 됐다”면서 “조문객들이 안내에 잘 따라주고 있다”고 했다.

분향소 앞을 지나던 미국인 관광객 라이언 램(21)은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이렇게 질서가 잘 지켜진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있는데, 전직 대통령에 대한 추모 열기는 한국의 독특한 문화인 것 같다”며 사진기 셔터를 눌러댔다.

그러나 일부 조문객은 경찰이 분향소 주변에 전경버스를 배치한 데 대해 불만을 나타냈다. 직장인 안영훈(31)씨는 “정부 공식 분향소도 있지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차린 곳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시위를 하는 것도 아닌데 경찰이 겹겹이 막을 필요가 있느냐”고 말했다.

  ◆정부 공식 분향소에도 조문 행렬 이어져=행정안전부는 이날 전국 지방자치단체 81곳에서 분향소를 설치했다고 밝혔다. 서울에는 서울역사박물관 1층 현관과 서울역 시계탑 앞 광장에 정부 공식 분향소가 설치되는 등 7곳에 분향소가 마련됐다. 정당과 종교단체, 시민단체 등이 설치한 민간 분향소도 197곳으로 늘었다.

서울역사박물관 분향소에서는 오전 8시 공동장의위원장인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노 전 대통령 영정 봉안식을 거행한 것을 시작으로 조문이 개시됐다. 오전 9시 한승수 국무총리 등 국무위원들이 조문했다. 한승수 총리는 방명록에 “삼가 명복을 비오며 유지를 받들어 국가 발전과 국민 통합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이어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와 이상득 의원,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 오세훈 서울시장, 강희락 경찰청장이 조문을 다녀갔다. 이용훈 대법원장과 이강국 헌법재판소장, 김황식 감사원장,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 등도 분향소를 찾았다.

임채진 검찰총장은 이날 오전 문성우 대검 차장, 한명관 대검 기획조정부장과 함께 조문했다. 조은석 대검 대변인은 “임 총장이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당일인 23일 오전 법무부에 사표를 냈으나 김경한 법무부 장관이 ‘사태 수습이 우선’이라며 25일 오후 사표를 반려했다”고 말했다.

김승현·장주영·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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