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카드 제국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43면

 빌 클린턴의 대통령 시절 굴욕 사건이다. 1999년 3월, 유타주에서 꿀맛 같은 휴가를 즐기던 그가 서점에서 책을 고른 뒤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죄송하지만 카드 유효기간이 지났는데요.” “아, 새 카드 챙기는 걸 깜박했는데 나 ‘빌 클린턴’이오.” 점원이 카드회사에 전화를 걸어 거래 승인을 요청했지만 헛수고였다. 비서에게 돈을 빌려 책값을 치른 그는 허둥지둥 서점을 빠져나와야 했다.

막강 권력을 자랑하는 미국 대통령조차 카드 문제로 인한 낭패는 피해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한국도 그렇지만 신용카드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미국의 카드 중독은 심각하다. 2000년 초 신용카드 발급 규모가 무려 15억 장. 카드 이용자 한 사람당 10장꼴이었다. 이 중 대다수가 다달이 최소한만 갚고 나머진 나중으로 미루는 회전식 결제를 한다. 이런 식으로 쌓인 카드 빚이 집집마다 평균 8400달러(약 1000만원)에 달한다.

“한 푼을 아끼는 게 한 푼을 버는 것”이란 벤저민 프랭클린의 청교도적 가치관을 떠받들던 미국인들이 어쩌다 카드 빚의 노예로 전락한 걸까. 『신용카드 제국』의 저자 로버트 매닝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가정의 소득 증가가 소비 욕구 폭발로 이어진 걸 배경으로 지목한다. 대형 소매업체마다 단골을 위한 자체 카드를 선보였고, 49년 최초의 범용 카드인 다이너스 카드가 탄생했다. 58년엔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가 회전식 결제가 가능한 사상 첫 신용카드를 내놓으며 카드 춘추전국시대의 막을 올렸다.

초기부터 기승을 부린 이전투구식 마케팅이 문제를 키웠다. BOA는 고객 1억 명에게 허락도 없이 카드를 발송했다. 후발 은행들마저 이를 따르자 ‘묻지마 발송’을 금지하는 법까지 등장했다. 80년대엔 경영난에 처한 은행들이 ‘부모가 동의해야 한다’는 내부 규정을 슬며시 없앤 뒤 소득 한 푼 없는 대학생들에게 앞다퉈 카드를 발급했다.

그 탓에 평생 ‘마스터카드로 비자카드를 메우는’ 삶에 길들여진 미국인들이 요즘 곤경에 빠졌다. 실직과 부도로 ‘돌려 막기’마저 힘들어진 이들이 늘며 연체율이 치솟고 있다. 모기지 대란에 이어 카드 대란이 위기의 두 번째 뇌관이 될 공산이 커졌다. 최근 오바마 정부와 의회가 카드업계에 고강도 규제의 칼을 빼든 이유다. 이 참에 미국 사회가 ‘버는 만큼만 쓴다’는 상식을 돌이킬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신예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