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스타일]"거칠수록 끌린다"… 하드보일드 제2전성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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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먼저 세상은 더럽고 음모로 가득차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기말의 영화와 문학에서 다시 솟아나고 있는 '하드보일드 스타일' 이 결코 와닿지 않을 것이다.

하드보일드 (hard - boiled) .미국인들의 말로 (계란) 완숙 또는 인정머리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범죄물을 다룬 허구의 세계에 익숙치 않다면 여전히 생소하다.

그러나 인간과 관계의 온갖 비열한 진상을 보아온 사람에게는 그리 동떨어진게 아니다.

하드보일드는 냉혈질 탐정을 수사 (修辭) 하는 형용사다.

그러나 이제는 음울한 후기산업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태도와 심정을 요약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비정한 탐정을 만들어낸 필름누아르의 세계를 현실에서 곧잘 목도할수 있기 때문일 게다.

40~50년대 미국영화에서 유행하던 필름누아르가 최근 다시 번성하고 있다.

수작들도 잇따른다.

세계의 영화광들과 비평가들을 매혹시킨 커티스 핸슨의 'LA컨피덴셜' 에 이어 코엔 형제의 '빅 르보스키' , 로버트 벤튼의 '트와일라이트' , 폴커 슐렌도르프의 '팔메토' 등 우후죽순으로 나오고 있다.

각종 영화제와 매체에서 집중조명을 받고 있는 작품들이다.

세기말과 필름누아르,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탐정은 끔찍한 사건들을 접하면서 끝없이 튀어나오는 단서들에 의해 부패와 악행의 진상을 드러낸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밤거리와 다 낡은 술집을 무대로 주인공은 파멸의 길을 치닫는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요녀 (팜 파탈) .매혹적인 여자와 살인마들이 펼치는 긴장감은 끝까지 관객/독자들을 사로잡는다.

사실 이는 30년대 색다른 B급소설, 즉 하드보일드 소설을 근간으로 한다.

나중에 필름누아르라는 형식으로 영화화한 이들 소설의 서술은 기성의 글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주관적인 심리묘사를 철저히 배제하고 상황묘사에만 치중하기. 단문으로 간결하게 서술하면서 독자들에게는 충격적인 사실들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 등이다.

하드보일드 문체의 시조로는 '살인자들' 등의 단편소설 작가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꼽힌다.

이 분야의 거장 레이먼드 챈들러 ( '빅 슬립' '기나긴 이별' 등).대시얼 해밋 ( '말타의 매' ).제임스 케인 (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 등도 30년대 하드보일드의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들이다.

그리고 40년대 이후엔 소설이 스크린으로 옮겨져 필름누아르로 넘어간다.

최근의 영화작가들은 하드보일드 작품에 대한 오마주 (존경심으로 따라하기) 를 주저하지 않는다.

데뷔작 '분노의 저격자 (Blood Simple)' 에서 필름누아르의 매력을 한껏 발산했던 코엔 형제. 그들은 30년대 갱들을 다룬 '밀러스 크로싱' (90년)에서 되도록이면 30년대 소설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말씨와 대사내용까지 그대로 답습했다.

그런 성향은 최근작 '빅 르보스키' 에서도 다시 재현된다.

누아르 스타일을 사회적인 문제제기의 수단으로 주제를 확대시키고 있는 켄 로치나 아벨 페라라의 작품들은 군더더기 없이 충격적인 진실을 까발리는 방법으로 하드보일드의 비정함을 느끼게 해준다.

심지어는 '터미네이터2' 에서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재현한 기계인간의 건조한 담론들도 하드보일드와 비슷한 유형에 해당한다.

이는 최근의 광고.음악.패션에도 얼핏얼핏 엿보여 포스트모더니즘의 실례로 거론되기도 한다.

하드보일드의 매력은 과연 뭘까. '말타의 매' (41년.존 휴스턴 감독) 의 주인공 샘 스페이드 (험프리 보가트) 의 모습이 상징적이다.

굳은 표정 이면에는 많는 사연과 감정이 담겨있는 듯하고 툭툭 내뱉는 말과 행동에는 여러가지 의미들이 중첩되어 있는 듯하다.

단도직입적으로 핵심에 접근하려고 하는 스타일 또한 그렇다.

겉보기에 하드보일드는 관객/독자에게 불친절하다.

하지만 한번 빠져들면 무한한 매력덩어리로 다가선다.

롤랑 바르트의 미학이론대로라면 추상과 상징이 갖는 변주의 자유로움이다.

작가가 내놓은 텍스트를 독자가 즉흥적으로 해석하고 수용하는 것. 환희는 거기에서 시작된다.

채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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