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은의 세상풍경]무슨 꿈을 꾸나…노숙자들 '기약없는 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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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3월의 어느 신새벽. 지하철 서울역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찬기운이 흐른다.

부스럭부스럭 신문 접는 소리 - .누군가 벌써 일어나 서울역 대합실로 향하나 보다.

3시에 문을 열고나면 그곳은 금방 집 없는 사람들의 점령지다.

조금 시간이 흐른 5시20분. 수원행 전철을 타기 위해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긴다.

2호선에 익숙한 사람들은 시청역으로 몰려간다.

물론 무임승차다.

홈리스, 우리말로 노숙자. 서울역 대합실 문이 닫히는 0시30분부터 방황은 시작된다.

몇몇은 광장에 불을 지핀다.

시선을 서로 피하면서 나누는 긴 잡담. 잠시 눈을 붙일 요량으로 지하보도로 들어서면 이미 그곳은 쓰러진 사람들로 만원이다.

어디서 한꺼번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쏟아졌을까. '터줏대감' 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한편으론 새 얼굴들이 반갑기도 하다.

오늘은 한 자선단체에서 공짜점심을 주는 날. 지하철 2호선 을지로3가역 부근 쁘렝땅백화점 쪽으로 가자. 천국으로 가는 계단 같은 곳이다.

플라스틱 그릇에 밥.국.김치가 범벅된 것이긴 해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게 좋다.

직장을 찾아나선 길의 오랜 방황은 언제나 끝날까. 조그만한 벌이라도 생기면 5천원에 잠자리.라면.읽을거리를 해결하는 서울역 인근 만화가게라도 갈텐데. 그리고 기약없는 '출장' 도 곧 접어야지. 천안의 명물 호두과자 한상자를 사들고서….

그림 = 최재은〈명지대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글 = 허의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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