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인터뷰]대학교수 된 중학중퇴 영화박사 임권택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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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영화현장을 지휘하는 감독에게 학위를 준다면 임권택 (林權澤) 감독은 분명 박사급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학위가 없으니 林감독은 공식학력 중학중퇴로 오늘도 대졸 제작진을 지휘한다.

우리 대학도 이제 이런 장인을 박사학위 보유자 못지않게 대접하는 인식의 변화를 보여 반갑다.

동국대가 그를 올3월학기부터 교수로 모신 것이다.

서울대가 역시 이번 학기부터 고졸 학력이지만 한옥 연구.건축의 명인인 신영훈 (申榮勳) 씨를 강단에 모신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학생들로서는 생생한 현장학을 전수받을 수있으니 행복이 아닐 수 없다.

林감독과 오랜 세월 짝을 이뤄 '아제아제 바라아제' '서편제' '축제' 등을 만든 태흥영화사 (대표 李泰元)에서 林감독을 만나 '영화현장학' 에 대해 들었다.

- 지난 13일 첫 강의를 하신걸로 압니다.

"연극영화과 학생들만 온게 아니고 신방과 학생들도 오고 대학원생들도 왔더군요. 오래된 감독이라니까 얼굴보러 왔겠지요. 첫 날은 제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만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2시간이 금방 지나더군요. "

- 林감독은 '어눌한 말투' 로 유명한데 강의가 쉽지 않을텐데요.

"알아서 들어주기 바란다고 미리 양해를 구했어요. 내가 경험한 것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전달할 것인가가 큰 과제입니다.

횟수가 거듭될 수록 요령이 붙지 않을까 합니다."

- 교수와 감독 일을 병행하시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학교측과 그 얘기를 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난 옆을 돌아보지 못하는 성격이거든요. 휴강해도 양해되어야 한다고. 영화를 만들 때는 학생들이 현장에 와서 공부하는 것도 좋겠지요. 영화제작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살아있는 교육이 되겠지요. "

- 林감독의 교수임용을 '실용 또는 실질 중시' 의 사회현상으로 봐야겠지요. 현장중심의 학문이 되는 거고, 또한 장인을 존중하는 풍토가 조성되고 있다는 거죠.

"그 문제가지고 첫 강의 때 얘기했습니다.

저는 62년부터 '두만강아 잘있거라' 에서 시작해 72년까지 50여작품을 했죠. 한마디로 그 10년간은 저급한 영화를 쏟아낸 시기입니다.

지금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영화에 대한 이론적.학문적 바탕이 있었으면 그토록 헛세월을 보낸 기간이 길었을까 하고요. 그러나 저는 학생들한테 학문이나 이론같은 거는 가르칠래야 가르칠 수가 없죠. 실패한 것이든 성공한 것이든 현장에서의 경험을 얘기해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 강의를 어떻게 진행할지도 궁금합니다.

"재미있게 해야 할텐데…. 한 주는 내 영화를 보여주고 그 다음주에 영화에 대해 얘기하는 방식으로 합니다.

각 영화에 내가 무엇을 담고싶어 했는지, 예상대로 된 부분은 어떤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또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요. 평론가들 중에는 내 영화를 가리켜 "진부한 형식" 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평론가들은 "주제나 내용을 잘 담아냈다" 며 주목해주기도 하죠. 또 지금까지 감독으로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력은 어디 있는가하는 것을 얘기해보고 싶어요. 어딘가에는 배우는 학생들이 찾아낼 부분이 있을 겁니다.

창의력은 어떻게 뽑고, 연기는 어떻게 지도하고 아무튼지 현장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들을 다양하게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 자신이 도태 안되고 생명력을 지켜온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감독이란 존재가 식물이나 나무같다고 생각해요. 유목생활하는 유목민처럼 뿌리 자체가 떠다니는 그런 삶과는 다른거죠. 감독은 자기가 나고 성장한 토양을 결국엔 영화에 담아내지요. 그래야만 영화에 담기는 삶이 진솔한 것이 될 것이고, 그렇게 부대낀 삶이 영화로 옮겨졌을 때에야 관객과 진정한 공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영화는 체험한 삶을 담아내지만 그것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고 창의적 재현인데, 이런 것들을 중시해온 작업이 필름의 생명력을 높인 원인이 아닐까합니다.

- 형식이 진부하다는 평가에 대해서는요.

"형식이라는 것이 모방이어서는 안될테고, 뭔가 좀더 새로운 형식이어야 하는데…. 긴세월동안 '임권택 필름' 다운 양식을 만들고자 노력했지만 그것이 늘 미흡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나는 천상 한국인이고, 때문에 필름자체의 리듬이나 속도감도 우리 즉, 한국인이 갖는 리듬이나 속도감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형식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겨지는 내용이란 것도 한국적 정서가 필름 속에 확실하게 드러났을 때야 제대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경지가 절대로 쉬운게 아니고, 노력은 하지만 이도저도 아닌 채로 끝날 수 있죠. - 그 문제와 관련해 강의시간에 특히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이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나는 어떤 영화를 함으로써 지금까지 살아남았는가.

표절이나, 무슨 영화가 된다하면 다들 우르르 몰리는 세태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나는 왜 이 소재를 갖고 영화를 만들려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제가 '씨받이' 란 영화를 만들게 된 것은 나의 일상생활에서 어머니와 나와의 관계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내가 영화한답시고 떠도는 걸 보니까 집안의 제사가 걱정되는 눈치셨습니다.

당신께서 살아계실 동안은 아들인 제가 그럭저럭 제사를 지내지만 돌아가신다면 문제가 있을 거라 생각하신거죠. 어머니의 이런 생각때문에 어느새 어머니와 나사이에는 불편함이 끼어들었죠. 내가 장남인데, 도대체 왜 장남이 이런 것을 떠맡아야 하는 것이며, 남아선호사상은 과연 무엇인가.

남아선호사상이 우리 살아가는데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제게 큰 관심으로 떠올랐습니다.

이러한 관심들이 깊이 물려있을때 바로 '씨받이' 가 영화로 옮겨질 내적 체계가 잡힌 것이죠. 그리고 남아선호사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이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가 가닥잡히고 난 뒤에야 영화를 찍게 되는 겁니다.

앞 뒤 없이 유행을 좇지 않고 삶에서 우러난 신중한 얘기가 있은 뒤에야 그것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고민할 수 있는 겁니다."

- 그렇다면 요즘 젊은 감독들 영화에 대한 생각도 궁금합니다.

"다양한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죠. 기교도 많이 들어가고. 저도 젊었으면 그렇게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무턱댄 기교는 다 자기 무덤을 파는 일입니다."

- 지난번 영화 '창' 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林감독답지않은 영화라는 거지요.

"내가 의도했던 대로 제대로 찍지 못한 작품인 것은 사실입니다.

전체적인 틀이 잘못됐고요. 시간을 좀더 충분히 갖고 했더라면 그렇게 거칠게 보이지는 않았을텐데하는 아쉬움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애초에 담고자 한 것이 맘대로 되지 않았죠. 제작품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가 이제는 어깨를 짓누릅니다.

그 괴로움은 때때로 영화를 그만두고 싶은 생각을 들게 할 정도죠. 그런 부담을 훨훨 털어내고 일을 하면 좋겠는데. 어느새 영화를 찍으면서 '이건 또 어떤 소리를 듣게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 새작품은 준비하고 있습니까.

"자꾸 돌아다니고 있는거요. 사람들 만나고 얘기듣고. 나이 먹은 만큼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이가 밴' 영화, 어두운 얘기보다는 인생의 밝은 면을 보여주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만난사람 = 이헌익 대중문화팀장 ·사진 = 임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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