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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 난장 6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밤 열두 시. 동업하는 여자가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준 뒤, 그 밤중에도 목욕을 하고 오겠다며 술청을 맡기고 나간 사이 봉환은 또 몇 번인가 자신의 방만한 처신을 스스로 나무라곤 하였다.

그러나 목덜미와 겨드랑이에 찌든 땟꾹을 말끔하게 씻어내고 돌아온 아낙네의 복숭아 같은 얼굴을 보는 순간, 봉환은 다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가고 사추리가 뿌듯해오는 거북함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 동안의 후회는 삽시간에 자취를 감추고, 여자를 지나칠 수 없는 억센 남자와 살갗이 뜨거운 남자를 기다리던 여자만 거기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에 목말라 애간장이 타는 사람들처럼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 불을 껐다.

사십세를 넘기면서 더듬고 쓰다듬고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사랑이란 말의 덧없음을 터득하고 있는 듯 홋이불 하나를 깔자마자, 속옷도 입지 않았던 몸뚱이를 아낌없이 노출시키며 봉환을 향해 팔을 벌렸다.

그러나 시선만은 똑바로 바라보기 민망했던지 옆으로 살짝 돌린 자세였다.

잠이 깬 것은 새벽5시 전이었다.

술청의 미닫이문이 부서져라 하고 땅땅 치고 있는 사람은 변씨였다.

뭐라고 소리까지 질러댔는데, 아직 잠결에서 미처 깨어나지 못해 뒤통수 얻어맞은 기분인 봉환으로선 알아들을 수 없었다.

먼저 일어난 아낙네가 어둠속을 헤집고 축축하고 비린내 나는 옷을 추슬러 건네주는 대로 꿰어 입기 시작했다.

그 경황 중에도 아낙네는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던 한마디를 빠뜨리지 않았다.

"다음 장날도 오실 테지요?" "모르겠소. 나하고 동업자라 카는 저 사람들 소란피워 쌓는 꼴 좀 보소. 저 등쌀에 내가 오고싶다고 올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소. 저 떨거지들 뚝 떼놓고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네. " "이봐, 봉환이. 남원 춘향이가 강원도 진부에 나타났나, 서울 이몽룡이가 춘향이 보러 진부에 나타났나? 냉큼 나서지 않고 뭘 또 뜸을 들이고 있나?" 그러나 서둘러 술청으로 나선 아낙네가 미닫이문을 따고 빠끔하게 얼굴을 내밀고 점퍼깃을 귀가 덮이도록 치켜 입었는데도 사시나무 떨 듯하고 있는 변씨를 구슬렀다.

"뭐가 그렇게 바뻐요? 잠시 들어와서 숨 돌리고 앉았으면, 배추시래기에 된장 버무린 술국 얼큰하게 끓여 올릴 테니 속이나 데우고 떠나요. 영월까지라면 기어간다 해도 두 시간 반이면 뒤집어쓸 텐데, 똥 마려운 강아지 모양으로 왜 그렇게들 안절부절 못합니까. " "아줌마, 꼭두새벽부터 재수없게 웬 개소리여? 날보고 똥 마려운 개라구 했겠다? 얼큰한 술국이라면 저기 있는 감미옥 해장국이 아니라 하더라도 회가 동하지만, 내뱉는 말이 개차반이어서 들어갈 엄두가 안나네. " 미닫이 문을 사이에 두고 주방 아낙네와 실속도 없는 입씨름을 하고 있었는데, 자동차에 시동이 걸리고 있었다.

봉환이가 어느새 족제비처럼 몸을 날려 냉큼 운전석으로 올라탄 모양이었다.

뒤를 돌아볼 것도 없이 영월길로 들어섰다.

길은 아직 캄캄한 밤중이었다.

산모퉁이를 돌 때마다 빙판길이 나타나는데도 봉환이가 속력을 늦추지 않았기 때문에 긴장되었던 두 사람은 평창 당도할 때까지 도무지 말이 없었다.

평창에 당도하고부터 날이 희뿜하게 밝아왔고, 그제사 철규가 속도를 낮추라고 주의를 주었다.

영월 덕포장은 시가지를 벗어난 동강 (東江) 옆 둑방 아랫길에서 열리고 있었다.

시가지에서 동강교를 건너면, 곧장 장시가 열리는 구도로가 나타나는데, 규모가 봉평이나 진부에 비할 바가 아닐 만치 큰 장이었다.

영월이 가근방 산간분지의 중심지이기도 하지만, 강원도와 충청도, 그리고 경상도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이기 때문이었다.

영월장은 예부터 옥수수, 감자, 명주, 그리고 체질적으로 땀을 많이 흘리는 사람에게 원기를 돕는 특효로 알려진 황기 같은 토산물이 활발하게 거래되는 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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