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 정부 500억지원 어디에 써야할까]유통망 정비 시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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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자금난에 허덕이던 출판계가 단비를 만났다.

대통령 지시로 정부가 5백억원을 긴급 지원키로 결정했기 때문. 그러나 정부 지원이 확정되던 지난 17일에도 중견 도매상 고려북스가 부도를 내는 등 시장 불안은 계속되고 있다.

신속한 대책이 나오지 않으면 상반기 중 출판사의 40% 정도가 문닫게 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여전하다.

청와대가 지원 의사를 밝힌 것도 위기에 처한 출판 시장을 조기수습하려는 뜻으로 풀이된다.

문제는 5백억원에 대한 구체적 재원 마련과 사용처. 문예진흥기금으로 2백억원, 재경부와 은행간 협의를 통해 3백억원 조성이 논의 중이나 실무 공무원들은 곤혹스런 표정이다.

우선 2천8백여억원이 적립된 문예진흥기금의 일부를 출판계로 돌리려면 기금의 임의 사용을 금지한 정관을 개정해야 한다.

재경부도 예산권이 없어 은행에 손을 내밀 형편이며, 다른 업종과의 형평성 문제로 선뜻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아사 (餓死) 직전의 출판계 지원을 미룰 수 없다는 데는 공감하고 있어 일단 긍정적이다.

문예진흥원은 문화부 장관의 승인이 있으면 기금의 전용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며, 불똥이 떨어진 문화부와 재경부도 현실적 방안을 적극 검토 중이다. 그렇다면 5백억원은 어디에 사용해야 할까. 정부의 세부안이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출판 전문가들은 출판대란의 뿌리인 유통망 정비를 1순위로 든다.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나춘호) 도 5백억원 가운데 2백억원을 건실한 대형 도매상 설립에 써야 한다고 내세우고 있다.

물론 단서가 있다.

영세 도매상들의 어정쩡한 통합은 절대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개별 도매상.출판사의 이해득실을 떠나 공개념에 의한 투명한 유통구조를 만들어야 오늘 같은 혼란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 지원금이 나오면 자기 몫을 챙기려는 관계자의 이전투구가 심해질 수 있다는 일부의 우려도 말끔히 씻어야한다.

때문에 '급할수록 돌아가라' 는 말처럼 시간이 걸리더라도 썩은 환부는 과감히 도려낸다는 당국과 출판인들의 굳은 의지와 면밀한 준비가 절실하다.

현암사 형난옥 주간은 "부도어음을 막아주는 식의 지원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며 "위탁판매.어음결제 등의 관행을 바로잡고 현금결제가 가능한 시스템적 전환이 필요하다" 고 말했다.

창작과비평사 한기호 이사는 "정부에 손만 벌리지 말고 출판계도 일정액을 출연하는 등 위기극복에 동참해야 한다" 고 주문했다.

그 다음으론 양서출판 지원이 시급하다.

출협은 1백40억원 정도인 출판금고 기금에 2백억원을 더해 우수도서 제작 지원비를 늘리자는 입장이나 일선 출판인들은 도서 구입비의 확충을 희망하고 있다.

지원비를 받아 책을 만들어도 팔리지 않으면 '약효' 가 떨어지기 때문. 특히 자본주의 시장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학술서의 안정적 출간을 보장하는 체제구축을 선결과제로 꼽고 있다.

까치출판사 박종만 대표는 "국가 등 공공기관에서 양서를 준강제적으로 소화하는 제도를 마련하는데 돈이 쓰여야 한다" 고 말했다.

한국출판협동조합 박기봉 이사장도 "공공도서관의 도서구입비 증액만이 양서출간의 활성화를 약속할 수 있다" 고 주장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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