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일본모델 몰락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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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아시아의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일본이 엔화강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경제대국 일본은 덩치에 걸맞은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준 적이 없다.

이 점에서는 중국만도 못하다.

중국은 위안화의 절하를 아직도 주변을 의식해 자제하고 있다.

금융개혁에 관한 한 일본은 별로 참고할 만한 모델이 못되는 듯싶다.

일본의 금융빅뱅이 힘든 이유를 이제까지 구체제를 지탱해 왔던 오쿠라쇼 (大藏省) 마피아와 그 조직이 뿌리내린 일본 금융계 인맥의 저항으로 보는 전문가가 많다.

저항이 거센 이유는 단순히 관료들이 권한과 이득이 없어질까 걱정해서라기보다 전후 (戰後) 일본의 경제발전과정에서 오쿠라쇼 마피아가 해왔던 역할이 성공적이었다는 자부심 때문이다.

일본모델이 실패했다면 벌써 일본의 금융시장도 서구적 형태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 점은 분명히 역사의 아이러니다.

정치권도 낡은 구조에 발목이 잡혀 있기 때문에 막강한 금융권력의 부패구조가 검찰에 의해 파헤쳐지는 이상한 개혁이 진행되고 있다.

수사과정에서 아라이 의원과 오스키 금융관리관이 자살하는 등 격렬하다.

여기에 '은행의 은행' 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금융의 중추신경 역할을 해 온 일본은행의 간부가 구속되고 수뇌부가 대폭 교체되는 등 신뢰도에 큰 주름이 갔다.

순전히 사법적 측면에서만 보면 도쿄지검 특수부의 '칼날' 이 우리 검찰의 무딘 날에 비해 예리하다든가 혹은 일본공무원의 책임지는 자세를 부러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눈을 돌려 불황중의 일본 금융기관 부패.독직사건의 표면을 한꺼풀 뒤집고 들어가 보면 제조업 위주의 일본경제 성공신화에 약점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금융관료 - 은행 - 대기업중역간의 인간적인 연결고리는 세계시장에서 일본제조업의 시장점유율을 늘리는 데 적합하도록 진화해 왔다는 가설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일본경제의 특장 (特長) 이라고 부르는 3대 요소 - 기업별 노조.연공서열형 임금구조.종신고용 - 가 바로 일본상품의 고품질을 가능케 한 기업내 협력주의의 기둥이라고 여겨졌다.

이같은 제조업 중심의 경제운용은 냉전시절처럼 세계경제가 비교적 구획돼 있고 특히 자본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는 나름대로 기능할 만한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면서 경제력과 군사력의 헤게모니를 동시에 추구하려는 미국정부의 경제 및 안보전략과 다국적기업.대형금융기관의 투자기회 확대전략은 서로 이해의 접점을 찾아냈다.

그것이 바로 금융 및 자본거래를 통한 국경 없는 거래로 새로운 경쟁력을 추구하는 것이고, 이는 정보통신산업에서의 비교우위 확보와 어우러져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게 됐다.

과연 달러당 환율 1천5백~1천3백원선이 가져다준 일시적 가격경쟁력 회복으로 우리의 수출이 늘어나면 외채도 갚고 미래가 보일 것인가.

1천5백억달러의 이자만 갚으려 해도 한 해 1백억달러보다 훨씬 많은 무역흑자를 내야 한다.

수출이 계속 늘어난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서 외국자본의 유입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러면 한국 기간제조업의 장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과연 대기업이 알짜기업을 매각하려 할 것인지, 또 외국인은 부실금융기관에 투자하려는지도 확실치 않다.

새 정부가 제시해야 할 경제청사진은 단연코 '수출 많이 하자' '절약하자' '외자 도입하자' 같은 도식적 정책보다 제조업 중심의 마인드를 떨치고 금융과 정보통신을 결합한 산업이 제대로 크게 하는 토양을 만드는 프로그램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대기업의 구조조정을 유도하는 정책도 다시 한번 숙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제조업을 금융 및 정보통신서비스와 동떨어진 채 육성한다는 것은 국경 없는 경제에서는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 (IMF) 의 처방전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세계적 석학들이 줄을 이어 한국에 지나친 고금리를 강요하는 것은 실수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같은 주장을 우리가 이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국제금융분야에서 전혀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동차나 반도체를 만들려는 노력과 자원의 일부라도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키우는 데 써야 한다.

그 이유는 바로 금융개혁이 모든 경제개혁의 기본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장현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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