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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사스 영웅’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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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홍콩 섬 한 중앙에 위치한 이 공원 한켠에 태극원(太極園)이라는 조그만 정원이 자리하고 있다. 사스 창궐 당시 자신의 책무를 다하다 유명을 달리한 의료진의 흉상이 모셔진 곳이다. 흉상 밑에는 간단한 이력이 새겨져 있다.

청하얀(鄭夏恩·여). 1997년 홍콩대 의대 졸. 홍콩 신계지역 타이푸 병원 내과 전문의. 2003년 5월 사스 발생 당시 주도적으로 사스 전담 의료진에 합류. 환자 치료 도중 사스에 감염. 그해 6월 1일 사망. 나이 30세.

충시힌(張錫憲·남). 1970년 홍콩대 의대 졸. 이비인후과 전문의. 병원으로 찾아온 사스 환자를 돌보다 감염. 5월 31일 사망. 58세.

라우윙카(劉永佳·남). 간호사. 신계지역 투엔문 병원 근무. 사스 환자 돌보다 감염. 4월 26일 사망. 사스 첫 희생자.

이들 말고도 4명이 더 있어 모두 7명이다. 의사가 3명이고 간호사가 4명이다. 여자 5명, 남자 2명이다. 나이는 30대에서 50대까지다. 의사는 각 병원에서 상위 10%에 속하는 명의였고 간호사는 각자 병원에서 최고 평판을 받았던 의료인들이었다고 홍콩인들은 말한다. 2년 뒤 흉상을 세우면서 홍콩은 그들을 ‘사스 영웅’이라 불렀다. 홍콩 역사에서 ‘영웅’ 칭호를 받은 경우는 이들 말고는 아직 없다. 혹자는 희생에 대한 보상이려니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의 족적을 알면 그런 생각 못 한다.

청은 병원에서 차세대 최고 의사로 꼽힐 정도로 실력파였다. 당시 정부가 사스 전담 의료진을 모집한다는 소식에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말리는 부모에게 그는 말했다. “딸을 사스에게 지는 의사로 만들지 마세요.” 충은 병원으로 찾아온 사스 환자를 전담병원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자신이 치료하며 말했다. “당신은 다른 병원으로 가는 동안에 위험해질 수 있다.” 라우는 사스 치료를 받으면서도 옆 병상 환자를 간호했던 간호사였다. 그래서 홍콩인들은 추모비에 이렇게 적었다. “전염병에 맞서 당신들이 보여준 희생과 관용, 그리고 인내의 숭고함은 찬사와 존경의 가치가 충분하며, 동방진주(홍콩)의 미래를 더 밝히는 진주빛이라는 걸 우리 모두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자는 지난주 태극원에 갔다가 열 살 난 손녀와 함께 온 70대 노인을 만났다. 홍콩 샤틴 지역에서 30년 동안 중의(中醫)로 일한 린원이었다. 그는 “사스로 사망한 내 아들과 아들을 치료하던 여기 청하얀 의사의 기일이 다가와 찾았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손녀에게 한마디 했다. “청 언니는 저승에서도 아빠를 치료하고 있을 게다.”

최형규 홍콩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