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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대통령의 통 큰 결단을 기대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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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파스칼은 ‘팡세(Pensées)’에서 이렇게 말했다. “위도가 3도 다르면 모든 법률이 무너진다… 강 한 줄기로 좌우되는 이상한 정의여! 피레네 산맥 이쪽에서 진리인 것이 저쪽에서는 오류가 된다.” 서울과 평양의 자오선상의 차이는 1도를 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남에서 옳은 것은 북에서는 틀린 것이고, 남에서는 긴 구속력이 있는 남북 합의가 북에서는 폐기의 대상이다. 남에서는 북에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고 생각하는데, 북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대북 적대정책에 매달린다고 인식한다.

개성과 금강산을 포함한 남북관계의 교착이 김정일의 건강에서 발단된 북한의 어수선한 집안사정과 이명박 정부를 길들이겠다는 북한 지도부의 과욕 탓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가지고 북한 탓만 하고 있어서는 남북관계가 안 풀려 공존공영정책은 이루어지지 않은 꿈으로 끝나고 개성공단은 폐쇄가 불가피할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문제 해결의 순서를 뒤집어야 한다. 정부는 북한에 억류된 현대아산 직원 석방을 위한 교섭을 통해 개성공단 문제를 풀고, 개성공단 문제 해결의 기제(Mechanism)를 살려 남북관계의 경색을 풀려고 한다.

정부의 이런 전략은 개성공단 사태의 원인을 개성공단에서 찾으려는 단견(短見)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성공단 문제는 남북관계 경색에서 불거진 파편에 불과하다. 북한이 개성공단에서 얻는 1년 수입은 3000만~4000만 달러다. 북한의 요구가 관철돼 그것이 1억 달러가 된다고 하자. 북한의 쪼들리는 나라살림에 그것도 작은 돈은 아니지만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서명한, 노무현의 표현으로 두 정상이 대못질한 10·4 선언에서 합의한 남한의 대북사업(또는 지원) 규모 15조원에 비하면 새발의 피도 안 된다. 해법은 여기에 있다.

북한은 이명박 정부가 남북협력의 큰 비전을 제시한 6·15 공동선언과 그 실천 계획인 10·4 합의를 인정하고 실행에 옮길 것을 요구한다. 이런 요구에는 경제 요소 말고도 북한의 자존심이 걸려 있다. 북한은 6·15 공동선언과 10·4 합의는 김정일 위원장이 서명한 달랑 두 건의 문서라는데,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둔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국회 연설에서 6·15와 10·4의 이행방안에 관한 협의를 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 대통령이 1972년의 7·4 공동성명과 1992년 남북 기본합의서까지 끌어들여 6·15와 10·4에 물타기를 했다고 해석한다. 북한은 이명박 대통령이 두 선언의 실천 의지를 밝히기 전에는 개성 외화벌이의 유혹이 아무리 커도 ‘남한 거부’의 자세를 풀지 않을 태세다.

어느 정치인은 북한이 말로는 남한에 강도 높은 공세를 취하면서도 동해안에 잠수정도 안 보내고 서해에서 무력도발을 하지 않는 데서 희망이 보인다고 말했다. 북한은 미국을 고려해 구체적인 대남 무력도발을 자제하는 것 같다. 이명박 대통령이 국방장관에게 대북 발언을 신중히 하라고 주문하고, 외교·통일 장관들이 건의한 PSI(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 구상) 전면 참여를 보류한 것도 북한이 열어놓은 경색 타개의 문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 대통령이 남북문제에서 참모들보다 훨씬 유연한 사고를 하는 것이 고무적이다. 북한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해 이상희 국방장관 식으로 대북정책을 군사적인 대비 일변도로 전환할 생각이 아니라면, 또 개성공단 폐쇄도 불사한다는 극단론으로 냉전시대로 회귀할 어리석은 생각이 없다면 이 대통령의 통 큰 결단을 기대한다.

곧 8·15다. 6·15와 10·4 선언을 확실히 인정하고 시행할 의지를 밝히는 역사적인 연설을 할 좋은 기회다. 그런 뒤 통일부 장관이 10·4 선언의 이행에 관한 회담을 제의하는 것이다. 예상되는 보수진영의 반발은 대통령의 정치력과 메시아적 소명의식으로 극복해야 한다.

남북의 경제력 차이는 40 대 1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실전 배치하기 전에는 남한이 북한에 휘둘린다는 주장은 빈약하다. 그런 사태를 막자고 남북관계를 대화는 놓지 않는 수준으로 회복하자는 것이다. 북한 국내 문제가 남북대결의 분위기에서 군부 주도로 정리되는 것은 위험하다. 김정일의 권력이 살아있을 때 민족사에 기록될 명연설을 기대한다. 그런게 바로 실용주의가 아닌가.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