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지방경제]3.기댈언덕 없는 중소기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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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기계부품을 생산하는 경기도 소재 A기업 金모 (56) 대표는 자기네 회사보다 원청회사인 대기업의 공장가동률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다.

원청회사의 가동률에 따라 자기 회사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A사의 2월 매출액은 지난해보다 무려 70% 줄어든 4억여원. 이에 따라 올 매출액을 지난해 (1백60억원) 의 38%에 불과한 60억원으로 크게 줄여 잡았다.

하지만 문제는 매출액이 아니다.

평균 30% 이상 상승한 원자재 가격을 감안, 납품단가를 19% 올려줄 것을 대기업에 요구했으나 혹만 하나 더 붙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인상은커녕 오히려 "7% 깎으라" 는 일방적 통보를 받은 것이다.

金대표는 "대기업도 어려운 사정인 줄은 알지만 '고통분담' 은 말뿐이고 구조조정 비용을 중소기업에 모조리 떠넘기고 있다" 며 "그나마 물량을 얻지 못하면 꼼짝없이 회사 문을 닫아야 할 판이니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 고 말했다.

1월초 만기도래한 어음 1억원을 막지 못해 흑자도산한 전남영암군 철강가공업체 B기업 관계자는 "대기업 구조조정이니, 빅딜 (대기업간 사업교환) 이니 열심히 해봐야 중소기업 다 죽고 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며 정부의 관심이 대기업의 개혁에만 쏠리는 데 대해 불만을 털어놨다.

국제통화기금 (IMF) 관리체제 이후 모든 기업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지만 지방 중소기업들이 더 혹한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구조조정의 태풍에 휘말린 대기업들은 '손보기 쉬운' 중소기업에 구조조정 비용을 상당부분 떠넘기는 바람에 중소기업들이 훨씬 어려운 지경에 빠져들고 있다.

대기업들이 경비절감 방안의 하나로 아웃소싱 (외주) 을 늘리고 있지만 중소업체들은 별로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다.

오히려 하청업체간의 가격인하 경쟁을 일으켜 납품가격을 깎으려는 속셈이 아닌가 하고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자금난도 지방 중소기업들이 더욱 심하다.

'현금은 챙기고 어음은 돌리는' 일부 원청기업들 때문이다.

자동차부품 업체인 울산시 소재 B사 관계자는 "지난해 12월이후 원자재를 공급하는 대기업으로부터 현금으로 결제하지 않으면 물건을 안주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며 "반면 납품처인 대기업으로부터는 현금을 받아본 적이 없다" 고 말했다.

IMF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1천만원 이하는 현금으로 결제해 주고 어음의 경우 30일짜리가 기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현금은 구경도 못하고 어음 결제기간도 60~90일 이상으로 대폭 늘어났다는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어음기간을 늘리지 말도록 시정조치를 내려도 그때뿐이다.

B사 관계자는 "시정명령을 받은 대기업은 일단 과도하게 길어진 어음기일만큼의 금리를 계산해주지만 다음번 물건값 정산때 손해 (?) 본 만큼 반드시 챙겨가기 때문에 득될 게 없다" 고 말했다.

그러나 독자적인 영업기반만으로 버텨야 하는 중소 제조업체들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기댈 언덕이 있는 이들 대기업 하청업체들이 부럽기만 하다.

환율상승에 따른 가격경쟁력 회복으로 모처럼 섬유류 수출이 활기를 띠고 있지만 대구 성서공단 원사 (原絲) 업체 C사는 지난달 말 문을 닫고 말았다.

원자재 가격이 30% 이상 폭등, 부담을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환율급등에 따른 환차익도 자금여력이 있는 대기업의 몫일 뿐 중소기업에는 먼나라 얘기에 불과하다.

온실용 철구조물을 생산하고 있는 목포시 W기업은 일본으로부터 20억원 규모의 수출주문을 받아놓고도 원자재를 살 돈이 없어 공장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연세대 경제학과 김학은교수는 "대기업의 하청에만 매달려 독자적인 연구와 시장개척을 게을리한 중소기업에도 많은 책임이 있다" 면서도 "대기업.중소기업 간의 공정한 협력관계를 확립하고 유망 중소기업에 대한 신속한 자금지원 등 폭넓은 지원대책이 신속히 마련돼야 한다" 고 밝혔다.

특별취재팀 = 길진현 경제2부차장, 홍병기·양선희·신성식·김준현 기자, 박장희 경제1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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