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대사관들 "우리도 속탄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 완공을 눈앞에 둔 서울 구기동 러시아 대사관저. 오종택 기자

▶ 서울 중구 정동에 위치한 미국 대사관저 ‘하비브 하우스’는 1884년 미국 푸트 공사가 조선왕실에서 사들여 사용하고 있는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중앙포토]

'가느냐 마느냐'.

요즘 각국 대사관이 큰 시름에 잠겼다. 최근 새 수도 예정지가 발표되는 등 정부의 수도 이전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 각 대사관은 서울에 남을지, 새 수도로 옮길지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대사관들은 원칙적으로는 "행정기관이 새 수도로 간다면 업무의 효율을 위해 공관도 옮겨야 한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엄청난 이전비가 드는 데다 주요국 공관의 경우 유서 깊은 문화재급 건물이어서 각국은 매우 망설이고 있다. 또 새 수도가 서울에서 가깝다는 사실도 이들의 발목을 잡는다. 콜린 헤슬타인 호주 대사는 "원칙적으로 대사관은 수도에 있어야 한다"면서도 "기차로 1시간이면 누구에게나 무척 가까운 거리"라고 말했다. 대사관 측은 경제나 영사업무 관련 부문은 서울에 잔류시킬 계획이다.

또 최근 토머스 허버드 미 대사가 공관 이전에 대한 입장을 밝혀 외교가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9일 고려대 강연에서 "한국의 수도가 어디에 있든 미국이 중요한 역할을 계속 수행하려면 미 대사관이 서울에 남거나, 적어도 일부라도 남아야 한다"고 발언한 것이다. 대부분의 대사관이 "다른 나라가 어떻게 할지를 감안, 판단하겠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허버드 대사의 잔류 발언은 다른 나라에도 큰 영향을 줄 것 같다.

현재 서울에 대사관을 둔 나라는 모두 88개국이다. 그중 공관 이전시 가장 난감해질 나라는 러시아다. 막대한 예산과 정성을 쏟아 2002년 정동 옛 배재고 자리에 대사관을 신축했다. 러시아는 3년에 걸쳐 2400여평 부지에 지상 12층 건물을 포함, 4개 동으로 이뤄진 대사관을 지었다. 건축 당시 러시아 측은 내부자재를 본국에서 공수해온 것은 물론 보안요원이 시멘트 반죽까지 감시할 정도로 보안에 신경을 써가며 공관을 완성했다. 또 구기동의 대규모 대사관저도 거의 완공단계다. 러시아로선 이런 건물들을 포기하긴 어려울 것이다.

중국 대사관도 고민에 빠졌다. 서울 명동의 대사관 터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군의 주둔지로 쓰이던 곳. 그 후 대만의 대사관으로 이용되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중국대사관으로 바뀌었다. 폭증하는 업무로 중국은 기존 대사관을 헐고 25층과 11층 건물 2개 동을 세우기로 하고 2002년 5월부터 효자동 4층 건물을 임시 대사관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현재 대사관 신축공사는 중단상태다. 드러내놓고 말하긴 어렵지만 수도 이전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대사관도 대사관이지만 정동 대사관저에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다. 1884년 푸트 공사가 조선 왕실에서 산 이 관저는 조선시대 양식을 간직한 유서 깊은 건물. 1973년 보수작업 때는 인간문화재인 이광규씨 등도 참여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 대사관은 3년 전 대규모 내부 신축공사를 마쳤다. 또 성북동 대사관저는 대지 3000여평의 대형 건물로 일본 대사관 측은 이전시 이만한 관저를 쉽게 구할 수 없을 것으로 걱정하고 있다.

용산구 동빙고동에 위치한 독일대사관은 아직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수도 이전에 대한 공식 통보를 아직 받지 못했기 때문에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대사관 측의 입장이다. 이탈리아는 대사관을 새 수도로 옮기되 서울이 계속 중요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에 영사.상무 부문은 남기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남정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