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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대학가 싼집은 '웃고' 비싼집은 '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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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매물이 없네요. 경제가 안좋으면 내놓는 점포가 늘어나야 하는데, 대학가 주변에는 전혀 매물이 나오지 않고 있어요."

서울 홍익대 인근에서 부동산을 운영하는 김영민(45)씨는 고개를 갸우뚱 한다. 불황으로 명동 등 일급 상권에서도 급매물이 나오고 심지어 빈 점포까지 눈에 띄는 일반적인 사회 기류와는 너무 다른 신촌 대학가의 모습을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부동산 업자는 "지금까지 경험으로 모두 '경제가 어려워도 대학가는 죽지 않는다'는 특유의 자신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경기가 나쁘다 보니 대학가도 싼집만 잘된다. 비싼집은 매상이 뚝 줄어 주인들이 울상이다. 사진은 언제나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신촌 대학가. (사진=곽진성 인터넷 중앙일보 대학생기자)

그 말대로 둘러본 대학가에서는 불황의 그림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홍익대.연세대.이화여대로 이어지는 신촌의 대학가는 방학인 7일에도 인파로 넘쳐 나는 모습이었다. 대학에서 계절학기 수업을 듣는 학생과 근처 학원을 찾은 수강생 뿐 아니라 친구나 애인을 만나기 위해 모여든 젊은이들로 길을 걷기 어려울 지경이다. 오후 6시를 넘어서면서 술자리를 찾는 젊은 직장인까지 가세하자 이 일대는 평일임에도 사람들의 물결이 넘실거린다.

홍익대 근처에서 패스트푸드 매장을 운영하는 김모씨는 "남들은 어렵다 말하는데, 우리 같은 경우는 작년이나 올해나 매출이 비슷한 것 같다. 아니 오히려 더 나아진 것 같기도 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매장은 몰려든 손님들로 문전성시다. 비단 이곳 뿐만이 아니다. 술자리를 갖기에는 이른 오후인데도 삼삼오오 모여든 젊은이들로 호프집 역시 붐빈다. 15년째 신촌에서 영업을 하고 있다는 H불닭 이주호(37) 사장은 "대학가에는 불황이 없어요. 다 자기하기 나름"이라고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술자리를 갖지 않으면 친구들을 만날 수 없으니까요. 차라리 다른 지출을 줄이고 말죠."

친구들과 맥주잔을 기울이던 한 대학생은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투로 말했다. 신촌 대학가는 젊은이들의 소비 1번지가 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 덕인지 신촌 대학가 상가 곳곳에는 '점포임대' 대신 '아르바이트 모집공고' 가 가득하다. 김진영(22.여)씨는 "요즘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기 쉽지 않은데, 이곳에는 호프집.음식점 등에서 일자리가 많아요. 집에서 좀 멀더라도 계속 다닐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늘도 있다. 카페, 일식집 등 비교적 가격대가 높은 업종은 불황의 직격탄을 피해가지 못하고 있다.

양주를 주로 취급하는 한 카페의 사장은 "호기롭게 카드를 긁어대던 손님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면서 카드 매출액이 2002년의 10~20%에 불과하다"며 "양주에 맥주와 안주를 곁들인 세트메뉴를 6만~8만원에 내 놔도 찾는 사람이 없어 5~6명이던 종업원을 최근 2명으로 줄였다"고 말했다.

1인당 2~3만원선인 곱창집을 운영하던 김모(31)씨는 지난달 업종을 1인당 3000원짜리 삼겹살집으로 바꿨다. 그는 "광우병 파동에다 경기 불황까지 겹쳐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며 "저렴한 메뉴지만 손님이 많아 매출액도 곱창을 팔 때보다 오히려 많아졌다"고 말했다. 생선회집도 최근에는 '소주 한 잔에 400원, 회 한접시에 9000원' 등 저렴한 가격을 내세운 체인점이 등장해 성업중이다.

주머니가 가벼워진 젊은이들이 분위기나 맛 보다 실속을 차리기 때문이다.

불황의 여파는 대학 내부에서 더 심하다. 대학생 최지웅(21)씨는 "주변에 휴학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 나 역시 경제 불황탓에 용돈을 줄였다"고 말했다. 실제로 연세대 종합서비스센터 김건래(46)씨는 "지난해 3200 여명이었던 휴학생 수가 올 1학기에는 4000명으로 늘었다"고 말했다.

휴학이 느는 것 뿐 아니다. 책도 안 팔린다. 연세대 구내서점을 운영하는 생활협동조합 장영도 과장은 "지난해보다 약 10%정도 서적 판매가 준 것 같다. 외환위기 때도 책 판매량에는 큰 변화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정말 어렵다. 경기 불황이 심하긴 심한 모양"이라고 말했다. 홍익대학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서점을 운영하는 최승규(30)씨는 "약 10~20% 정도 판매가 줄었다. 아무리 불황이라지만, 학생들에게는 술값보다는 책값을 절약하는 것이 쉬운 모양"이라고 말했다.

서점은 사라지고 술집은 늘어나는 대학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경기침체와 청년실업이라는 현실 앞에서도 대학생들이 쏟아붓는 술값으로 불황을 모르는 대학가의 모습은 변함이 없다.

송지은(21)씨는 "나 역시 마찬가지지만 대학생들의 소비 심리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책은 안사도 술.음식값은 아끼지 않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각종 모임에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구들도 적지 않다고 송씨는 덧붙였다. 아르바이트로 마련한 돈을 다른 학생이 아르바이트 하는 술집에 가서 아낌없이 쓰는 악순환이 한국 대학가의 현실이다.

곽진성 인터넷 중앙일보 대학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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