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4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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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숙연함이나 근엄한 것보다, 엉터리라 할지라도 재미있는 것을 훨씬 재미있어 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던 사건이었죠.” 거래도 없는 좌판을 변씨에게 맡기고 난전을 벗어나는 철규를 뒤따르며 강성민이 덧붙인 말이었다.

선착장을 저만치 벗어난 곳에 이르러서야 철규는 비로소 물었다.

“싱거운 질문이지만, 어떻게 왔어?” “그저 선배를 보러 왔을 뿐이에요. 그런데 제가 동요를 느끼는데요?”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농담이기를 바라지. 불과 사흘째인데도 장난이 아니더라구. 왜 그런 말 있잖아. 까짓것 수틀리면, 시골 가서 농사나 짓지 하는 거. 그거 대중없이 내뱉을 말이 아니더군.” “가볍게 보진 않아요. 선배가 환골탈태해서 강원도 건어물 상인으로 정착하게 될지는 아직은 미지수겠지만, 지금 당장 신선하게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현수막에 시구를 게시한 아이디어도 좋았어요.” “만약 후배가 지금의 나였더라면 어떤 조치를 했을까, 그걸 생각했지. 현수막은 얼른 보면 장난 같기도 한데 우리 일행들로서는 심사숙고 끝에 제작해서 게시한 거야. 선착장을 기웃거리는 사람들 대부분이 서울에서 온 여행객들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인데, 앞으로도 계속할 작정이야. 지금 당장은 매출로 연결되는 가시적 효과는 기대해서도 안되겠지만 오래 계속하다보면, 우리 일행의 이미지가 정착할 것 같거든. ” “정말 작정한 거예요?” “받은 잔은 비워야지. ” “사실은 그동안 형수님 찾아간 적이 있었어요. ” “안달하기 좋아하는 후배가 찾아가리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난 기대하는 것이 없어.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내 딸은 찾고 싶지만, 다른 미련은 전혀 없어. 제대로 차린 식탁을 고집하지는 않지만, 식탁이 아닌 곳에서는 밥을 먹지 않는다는 한 가지 원칙에만 숙달되어도 마음과 몸이 훨씬 편해질 수 있었어.” “냉담하더군요.” “그랬을 거야. ” “남자는 섹스를 하기 위해 사랑을 주고, 여자는 사랑을 얻기 위해 섹스를 한다는 설교를 듣기도 했지만, 선배를 잊어버리기 위한 발버둥인지는 몰라도 대화의 비중과 골자는 자책보다는 선배를 비난하는 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더군요. 선배의 출세를 위해 맞벌이 주부로선 힘겨운 노력을 쏟아부었다는 얘기였어요. 계절에 맞는 양복과 넥타이를 빈틈없이 장만했었고,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치우는 대신 컴퓨터를 들여놓도록 했었고, 외국어학원의 새벽 강의를 듣는 선배를 위해 새벽 5시에 아침 준비를 했었던 것은 나도 알고 있었던 일이었죠. 새벽 출근이라 하더라도 헤어 스타일과 선배가 걸어가는 모습도 체크해서 교정하려 했었답디다.

필요한 신문기사는 반드시 스크랩해서 읽어주었고, 액티브한 취미를 갖도록 유도했고, 일요일에도 회사로 보내려 했었고, 술자리에선 반드시 상사의 옆자리에 앉도록 신신당부했었지만 예의를 지키도록 주의를 주었고, 술 마신 다음날엔 지각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더군요. 시간에 쫓기더라도 동료나 상사들이 참가하는 야유회와 회식은 빠진 적이 없었고, 심지어 상사들의 생일과 경조사를 형수가 먼저 알아서 알려주었답디다.

귀찮고 어려운 일은 솔선수범하도록 했지만, 공은 언제나 상사에게 돌리도록 권유했다는 얘기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 모든 노력들이 어느날 물거품이 되고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거기엔 선배의 방만과 배신이 자리잡고 있었더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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