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한 아프리카서 빛나던 목걸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14호 11면

공식 직함은 ‘외교관 부인’이었다. 남편 김승영 전 대사를 따라 1971년 브라질부터 2002년 아르헨티나까지, 세계를 떠돌았다. 에티오피아에 발령받던 78년 무렵, 그는 시장으로 향했다. 현지에서 생살을 맞비비는 게 가장 좋은 적응법이라 여기던 그만의 통과의례였다. 총소리를 자장가로 여길 정도로 내전이 심하던 곳. 총알을 피해 찾아간 시장은 처참했다.

이경희 기자의 수집가 이야기 - 세계장신구박물관 이강원 관장

질퍽거리는 진흙 바닥에서 한 움큼씩 양파ㆍ마늘을 놓고 종일 팔아도 1달러를 못 버는 이들. 옷을 뒤집어 이를 잡아먹을 만큼 굶주림이 지배한 그곳에서, 한 여인의 은목걸이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충격적인 아름다움에 전율했다. 돈을 주고 사겠다고 했다. 여인은 불같이 화를 냈다. 목걸이는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의 가보였다. 아름다움에 눈을 뜨던 순간이었다. 장신구 수집가로서의 인생도 시작됐다. 이강원(60) 세계장신구박물관장이 30년간 모은 장신구는 3000여 점에 달한다. 금ㆍ은ㆍ호박 등 귀금속과 보석류의 환금 가치만 어림잡아도 아찔한 규모다.

“아마 집 두 채는 없앴을 거예요.”
남편의 눈치를 보며 버는 돈을 족족 장신구 수집에 털어 넣었다. 육안으로, 혹은 냄새로도 호박이나 금·은의 진위를 가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수집은 돈과 안목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그가 눈을 밝히고 찾아다닌 장신구는 돈 주고 사는 ‘제품’이 아니었다. 현지의 문화와 전통이 담긴, 세공사와 착용자의 영혼이 묻어 난 영물이었다.

먼저 현지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야 했다. 언어가 가장 큰 무기였다. 그는 영어ㆍ스페인어ㆍ독일어ㆍ포르투갈어를 할 줄 안다. 에티오피아 현지어인 암하릭어도 배웠다. 밥도 먹고, 선물도 줘 가며 친구가 됐다. 목숨도 걸었다. 콜롬비아에선 인디오의 금 장신구를 구하러 내전 중이던 지역에 가족 몰래 들어갔다. 목숨 걸고 찾아와 자신들의 언어까지 구사하는 동양 여자에게 그들은 결국 마음을 열었다.

“저는 두 얼굴로 살았죠. 외교관의 아내이자, 바닥까지 가야 되는 컬렉터의 두 얼굴을 위장하고 조율했죠.”
외교관 부인으로서의 그는 억척스럽기 그지없었다. 손님상에는 늘 한정식을 코스로 내놨다. 후식용 한과까지 손수 만들었다.

밤새 음식을 준비하고, 손이 고장 날 정도로 칼질했다. “같은 분께 중복된 메뉴를 내놓지 않으려고 매번 손님 리스트와 메뉴를 기록했어요. 통계를 내 보니 어림잡아 2만5000명을 대접했더군요.”
그는 10년 전 그런 외교관 부인으로서의 삶을 쓴 에세이 『세상을 수청 드는 여자』로 화제가 된 시인(詩人)이기도 하다.

“왜 그렇게 극성스러웠을까…. 돌이켜 보면 컬렉터로서의 삶에 대한 방어벽을 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렇게 하면 나중에 다 인정받지 않을까라는….”
수집벽은 웬만한 사람으로선 가기 힘든 곳으로까지 그의 등을 떠밀었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지는 않았지만, 뜯어말리지도 않았다. 한국에 돌아와 2004년 박물관을 세우는 것도 반대하지 않았다. 서울대 건축학과 김승회 교수가 설계해 서울 종로구 삼청동 골목에 지은 박물관은 ‘북촌의 별’이라 불린다. 그러나 은행 빚을 크게 진 건 부부 싸움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대사님(그는 남편을 ‘대사님’이라 불렀다)이 학예사 시험을 보겠다더군요. 둘째 딸 윤지와 같이 공부해 동시에 자격을 땄어요. 최고령 합격자가 되셨죠.”

큰딸 윤정씨는 네덜란드에서 박물관학 석사학위를 받아 왔다. 세계장신구박물관은 그래서 가족 학예사들이 운영하고 있는 셈이다. “가족과 함께 세계인의 영혼이 배어 있는 장신구를 한국인에게 보여 줄 수 있어 행복합니다.”



중앙일보 10년차 기자다. 그중 5년은 문화부에서 가요·방송·문학 등을 맡아 종횡무진 달렸다.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