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에게 술주전자로 맞은 김관식·형편 어렵자 약장수로 나선 임종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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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문단 풍경을 담은 자전적 에세이집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를 펴낸 신경림 시인은 “옛날 우리 세대가 어떻게 살았는지 젊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 자전 에세이를 쓰게 됐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로 시작해 “달빛 환한 마찻길을 절뚝거리는 파장”으로 끝나는 신경림(74) 시인의 열세 줄짜리 짧은 시 ‘罷場(파장)’은 우리 현대시의 한 면모를 드러내는 절창으로 꼽힌다.

문학평론가 염무웅씨는 ‘파장’은 물론 ‘농무’ ‘눈길’ 등이 포함된 신씨의 첫 번째 시집 『농무』가 “전후 한국시의 물줄기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밝힌 바 있다.

해는 곧 떨어지는데 갈 곳은 마땅치 않은 변두리 인생들의 서늘한 저녁. 소주 한잔이 간절해지는 정서를 환기시키는 신씨의 시편들은 후배 시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줬다. 1970년생인 문태준 시인은 지난달 열린 ‘창비 시선(詩選)’ 300호 출간 기념행사에서 “대학 시절 문학 동아리 선배들이 다른 건 그만두고 신경림의 『농무』만 부지런히 읽으라고 했다”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시편 뒤에 숨어 있는 혹은 시편들을 탄생케 한 신씨의 말간 맨얼굴을 엿볼 수 있는 자전 에세이집이 출간됐다.

‘파장’의 첫 줄을 제목으로 삼은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문학의문학)가 그것이다. 15일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예전부터 궁금했던, 첫 번째 줄의 ‘못난 놈’에 시인 본인도 포함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포함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시인들은 밥벌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건 물론 모든 면에서 못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1, 2부로 나뉜 에세이집 처음 절반은 초등학교 입학부터 졸업까지 1940년대 학교 풍경을 그리고 있다.

2부는 60년대부터 최근까지 신씨가 문단 생활을 하며 겪었던 문단 일화를 소개한다. 한결같이 사람들이 얽혀 있다는 점에서, 에세이집은 스스로 못났다며 몸을 낮춘 신씨의 눈에 비친 못난 인간 군상들 얘기다.

가령 신씨는 철저한 친일 행각으로 악명 높았던 초등학교 시절 교장이 해방 직후 국수주의자로, 미 군정하에서는 친미주의자로 변신을 거듭한 끝에 결국 국회의원까지 ‘해먹은’ 사연을 담담하게 전한다. 가치 판단이 배제된 사실 전달이 오히려 섬뜩하다.

‘소년 경림’의 가감 없는 모습도 눈길을 끈다. 신씨는 초등학교 5학년 학예회 연극 공연에서 주연을 맡았으나 막상 무대에서 대사를 잊어버려 울음을 터뜨렸던 일, 취해서 잠든 아버지 주머니를 몰래 털던 한때의 못된 도벽 등 낯 뜨거운 옛일을 고스란히 털어 놓는다.

2부는 ‘문단 기인 열전’이라고 할 만하다. 대취한 채 미당 서정주 시인 집에 세배를 갔다가 말을 삐딱하게 하는 바람에 막걸리 담긴 술주전자로 얻어맞은 김관식 시인, 술만 취하면 버스 안에서라도 자작시를 낭송하곤 했으나 정작 번듯한 문예지에서는 청탁이 없어 시 게재를 못했던 백시걸 시인, 형편이 어렵자 거리 약장수로 나섰던 임종국 시인 등 괴짜 시인들의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전한다.

신씨는 정작 “김관식이나 천상병 등 기인들보다는 조태일이나 이문구 등과 절친하게 지냈다”고 했다.

특히 조태일과는 신군부가 비상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하루 전날인 80년 5월 16일에 만나 “다들 데모하느라 야단인데 우리는 술이나 마십시다”라고 얘기가 돈 끝에 실제로 술 마시러 갔다고 했다. 항의 시위가 극성스럽기를 오히려 바라고 있다는 얘기가 돌 정도로 완강했던 신군부의 완력, 그 앞에서 어쩌지 못하고 술이나 마셔야 했던 ‘못난이들’의 아픔이 미세하게 느껴졌다면 궤변일까.

신씨는 “1940년대든, 70∼80년대든 과거 우리는 이만큼 힘들게 살았다는 점을 젊은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글을 썼다”고 했다.

하회탈처럼 환하게 웃는 신씨 얼굴 안쪽에 세류의 변화를 민감하게 읽는 서늘한 시인의 촉수가 느껴졌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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