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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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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4일 개봉한 영화 ‘천사와 악마’는 중세 가톨릭의 역사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다빈치 코드’를 쓴 댄 브라운의 또 다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가톨릭에 의해 탄압당한 중세 과학자들의 후손들이 바티칸을 상대로 복수에 나선다는 내용이다.

가톨릭의 반성을 은근히 촉구하는 이 영화가 전 세계에 공개될 무렵 진짜 교황은 이스라엘을 비롯한 중동 지역을 방문해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 모두에 화해와 공존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베네딕토 16세는 이스라엘 측의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방문해 애도를 표했고, 베들레헴에서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주권 국가 설립을 지지한다고 발언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경의를 표한 셈이다.

타 종교에 대한 관용은 천주교 교단의 입장에선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교황청은 이미 1965년 ‘비그리스도교에 대한 선언’, 즉 노스트라 아에타테(Nostra Aetate, ‘우리 시대’라는 뜻의 라틴어)를 통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유대교·힌두교·이슬람교·불교 등과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혈통이나 피부색이나 사회적 조건이나 종교적 차별의 이유로 생겨난 모든 박해를 그리스도의 뜻에 어긋나는 것으로 알아 배격한다’는 것이 요지다.

그러나 독일 출신인 베네딕토 16세는 그 정신에 역행하는 보수적인 행보로 이미 몇 차례 곤욕을 치렀다. 추기경이던 1990년에는 과학자 갈릴레이를 이단으로 지목했던 당시 교황청의 조치를 지지해 물의를 빚었고, 2006년엔 이슬람 비하 발언으로 아랍 국가들의 항의를 받은 적도 있다. 더욱이 올 연초엔 공공연히 반유대주의 성향을 드러내 1988년 파문당한 네 성직자를 복권시켜 국제 유대인 사회의 반발을 낳기도 했다. 그런 베네딕토 16세인 만큼 이번 방문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다소 긴장감이 흘렀지만 교황은 15일 별 무리 없이 일정을 마쳤다.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가 유럽 각국 군주들에게 “보병이든 기사든, 가난뱅이든 부자든, 기독교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악의 종족을 무찌르라”고 소리 높여 외친 뒤로 수백 년간 중동은 십자군과 이슬람군의 피로 물들었다. 그 성지에서 900여 년 뒤의 후임 교황이 평화를 설득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시대’의 정신이 아직 존중되고 있다는 위안을 준다.

 송원섭 JES 엔터테인먼트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