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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딩의 눈물겨운 ‘네버엔딩 스터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사례1

[중앙포토]

반도체 업체를 다니는 회사원 정모씨는 지난 2월 A사이버대 글로벌경영학과에 입학했다. “뭐라도 배워야 살아남겠다”는 고용 불안증 때문이다. 정씨의 ‘회사→학교→도서관→집’생활은 3개월째 계속되고 있다. 자주 가던 맥주집도 발길을 뚝 끊었다. 그는 “대학 졸업하고 학교는 그만다닐 줄 알았는데 회사 경영 상황이 어려워지다 보니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겨 다시 공부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사례2

의류업체 6년차인 권모씨는 지난 4월부터 구로디지털단지 B 영어학원에 출근 도장을 찍는다. 구조조정설이 나돌자 “경쟁력 있는 회화 능력을 보여줘야겠다”고 작심했다. 올 가을 출산을 앞둔 권씨는 “돌아온 뒤 책상이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돼 미리 내 영역을 확실히 다져놓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며 “직장인의 교육 정도도 부익부 빈익빈으로 가고 있어 지금 해두지 않으면 격차가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직장인의 ‘네버엔딩 스터디’가 눈물겹다. “실업자 100만 시대가 올 것”이라는 불안감을 피부로 느낀 직장인은 ‘설마 나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보신(保身)을 위해 자신만의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기존의 업무에서 전문성을 높이거나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아예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것이다. ‘주경야(夜)독’ 또는 ‘주경조(朝)독’족이다.

최근 출간되는 책 제목에서도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샐러던트 독하게 공부해야 살아남는다’‘(과장보다 일 잘하는)강대리 만들기’‘절대로 안 잘리는 월급쟁이, 죽어도 못 자르는 샐러리맨’등이 그렇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비즈니스 능력계발서 부분의 판매 추이는 지난해 1~4월에 비해 같은 기간 3.5% 증가했다.

◇돌아온 넥타이ㆍ뾰족구두 부대=직장인들이 밀집한 구로디지털밸리에는 지난 IMF외환위기 때 테헤란밸리와 비슷한 기운이 감돈다. 영어학원 등을 중심으로 ‘공부방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구로디지털단지역의 학원 밀집지역은 오전 6시부터 직장인들로 붐비기 시작한다.

카페 주변에선 ‘1대1 영어 회화’를 주고받는 수강생과 원어민 교사들도 볼 수 있다. 직장인 수강지원금제도를 십분 활용하는 이들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어학원 구로YBM의 김선화 원장은 “작년 이맘때와 비교해 수강생이 크게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한 푼이라고 아끼는 불황임을 감안하면 체감상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14일 구로YBM점. 강의 시간에 맞춰 ‘공부하러’ 온 직장인들로 로비가 가득 찼다.

◇대딩에 이어 직딩=사이버대학교 교정은 제2의 커리어를 쌓기 위한 직장인들로 붐빈다. 실무에 바로 적용할 수 있거나 자격증 취득이 가능한 글로벌경영과, 자신관리과 등이 특히 인기다. 지난달 교육과학기술부 발표에 따르면 4월 기준 현재 전국 17개 사이버대학 등록 학생은 2만1001명으로 이중 67.1%가 직장인이다. 경희사이버대학의 경우 ‘직업이 있는 입학생’은 지난해 4500여명에서 올해 500여명 정도 늘었다.

이중 20~24세가 14%에서 18%, 25~29세가 30%에서 33%로 각각 늘었다. 경희사이버대학 김혜영 입학관리처장은 “사회 생활을 하다보니 현재 학력으로는 진급의 한계가 있고 밀려나지 않기 위해선 다른 분야도 수준급이 돼야 하는 생각이 젊은 층에 자리잡은 것 같다”고 말했다. 평생직장이 없는 시대가 되면서 ‘미래를 보장받을 길은 배우는 길 밖에 없다’는 인식이 낮은 연령대부터 점차 올라오고 있다는 것이다.

◇공부도 ‘1+1’=인사포털 인크루트가 최근 직장인 1262명을 대상으로 ‘샐러던트’ 현황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57.2%가 일과 공부를 병행한다고 답했다. 이는 지난해 1월 조사(58.9%)와 비슷한 수치다. 그러나 1인당 ‘배우는’ 분야는 더 늘어났다. 항목별(중복 응답) 분석 결과 ‘전문자격증 취득’은 지난해 41.5%에서 48.3%로, ‘영어 학습’은 27.9%에서 40.2%로 각각 증가했다.

‘직무 관련 교육’(23.2→34.9%), ‘평소 관심분야’(19.6%→24.1%), ‘컴퓨터 활용 관련’(15.6%→22.4%) 등 대부분의 항목에서 증가세를 확인할 수 있다. 자기 계발 지출 비용은 지난해 평균 20만5000원에서 올해 22만 8000원으로 늘었다. 허리띠를 졸라매며 가계 소비를 줄이고 있지만 배움의 투자는 아끼지 않겠다는 것이다. 인크루트 이광석 대표는 “불황으로 고용불안감이 커질수록 ‘몸값 높이기’에 대한 직장인들의 관심이 높아져 일을 하면서도 공부를 하려는 경향이 더 강해진다”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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