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반포동에 사는 주부 유민자(54)씨는 저녁 무렵이면 아파트를 나와 한강시민공원으로 산책을 나간다. 시끄러운 도로와 빽빽한 빌딩숲을 지나 만나는 나들목과 한강변 풍경이 “비타민 같은 휴식시간을 준다”고 그는 말했다. 옅은 노란색을 띤 벽돌로 쌓은 벽, 터널 안에 커튼처럼 안팎으로 굴곡진 벽…. 최근 새 단장을 마친 반포 나들목을 보고 유씨는 “나들목이 아름다운 미술관으로 들어서는 길 같아졌다”며 감탄했다.
①로컬디자인이 설계한 성산 나들목. 외부 입구 날개벽에서부터 터널 안 벽까지 목재 바(bar)로 감싼 것이 특징이다. 목재 바 사이로는 은은한 조명이 새어 나온다. 반포 나들목도 로컬디자인 작품이다. ② 높은 육갑문(수문) 때문에 생긴 볼륨을 붉은빛 목재로 마감한 암사 나들목 전경(아틀리에 리옹 설계). ③ 3층 높이 램프를 타고 내려가는 길이 공원 같은 현석 나들목(제공건축 설계). ④ 유리처럼 보이는 강화플라스틱 블록으로 벽면과 천장을 장식한 신천 나들목(시스템 랩 설계).
◆‘토목 구조물’에서 ‘건축’으로=고급 레스토랑 인테리어에서나 보던 목재로 장식한 벽, 은은한 간접조명, 나무 마루 바닥, 지친 사람들이 잠시 앉았다 갈 수 있는 터널 안팎 벤치…. 한강 나들목이 최근 눈에 띄게 달라졌다. 나들목 디자인에 젊은 건축가들이 참여하며 변신 폭이 커졌다. 서울시가 ‘한강 르네상스’ 사업으로 추진해 온 나들목 전체 사업은 토목회사가 담당했지만, 이 회사가 디자인을 건축가들에게 맡기면서 ‘지하 굴다리’ 같았던 나들목이 ‘새로운 도시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건축가는 로컬디자인(소장 신혜원)·아틀리에 리옹 서울(소장 이소진)·제공건축(소장 윤웅원·김정주)·시스템 랩(소장 김찬중·홍택)등 네 팀이다. 각 건축가들은 모두 나이가 30대 후반이거나 40대 초반으로, 국내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뒤 각기 영국·프랑스·미국·스위스에서 유학하고 돌아왔다. 2007년 맨 처음 의뢰받은 곳은 로컬디자인으로 나들목 25곳을 두 달 안에 단장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디자인 하나를 여러 곳에 활용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신 소장은 “막상 현장 조사를 해보니 비가 많이 오면 침수되는 나들목부터 육갑문(수문)이 있는 곳, 차도와 보도가 같이 있는 곳 등 특성이 다 달랐다”며 “결국 여러 건축가가 나들목을 특성에 따라 나누어 진행하면서 프로젝트가 확대됐다”고 말했다.
◆기능에 감성을 더하다=기존 나들목은 하수구 구멍과 거의 비슷한 구조였다. 뚫어서 사람이 지나갈 수 있게만 하면 되는 기능만 있어서 방공호 같은 투박한 구조물에 불과했다. 일을 맡은 건축가들은 이 기능을 딛고 점프해 나들목의 존재를 공간적으로, 감성적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이곳을 지나가는 행인이 감성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상상했다. 그리고 새로운 체험을 디자인에 어떻게 반영할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나들목에 보도의 연장선이란 의미를 부여해 천장에서 자연광이 들어올 수 있도록 빛우물을 설계한 곳(금호)이 있는가 하면, 번잡한 도시와는 다른 세상이란 뜻을 살려 주민들이 경관을 바라보고 사색할 수 있도록 둔치가 없는 곳에 계단식 쉼터를 마련한 곳(가양)도 있다.
현재 나들목 25곳은 단장이 거의 마무리됐다. 뒤늦게 시작한 다른 9곳의 추가 공사는 6월 말이면 끝날 예정이고, 신자양 등 4곳의 신설공사는 이제 막 시작한 상태다. 네 팀의 건축가들은 “나들목 디자인은 건축가 입장에서 설계비를 따지자면 상업적으로는 ‘불가능한’ 작품이었다”며 웃으면서도 “하지만 시민들이 공간이 주는 가치를 경험할 수 있도록 공공 디자인데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미있고 보람도 큰 작업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이은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