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29> 히노마루 교실과 풍금소리 ③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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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말은 무섭다. 문자는 더욱 무섭다. 귀신이 어둠 속에서 통곡할 정도로 무섭다. 같은 사람인데도 ‘한국인’이라고 할 때와 ‘한국 사람’이라고 할 때 그 느낌은 달라진다. 한국인 이야기를 ‘한국 국민 이야기’라고 했다면 국민교육헌장과 같은 이야기가 될 것이고, ‘국민’이란 말 대신 ‘시민’이나 ‘민중’이라고 했다면 ‘인민’이란 말처럼 혁명의 과격한 이야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국민 해방, 국민 혁명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더 이상 말하지 말자. 아직 나는 초등학교 단계에서 한국인 이야기를 쓰고 있기 때문에 그 눈높이에 맞춰 말과 문자가 얼마나 힘이 센가를 이야기하겠다.

내 바로 앞 세대만 해도 『천자문(千字文)』으로부터 일생을 시작했다. 서당에 들어가는 첫날 배우는 것이 ‘하늘 천 땅 지’다. 서당 개 삼 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춘향전에 나오는 방자도 ‘천지현황(天地玄黃)’의 천자문 첫 구절쯤은 외울 줄 안다.

그런데 국민학교에서 내가 배운 글자는 ‘가나’였다. “アカイ アカイ ヒノマルノ ハタ(아카이 아카이 히노마루노 하타)”. ‘아카이’는 붉은색이고 ‘히노마루’는 해의 동그란 모양을 이르는 말이라고 했다. 여기까지는 『천자문』과 별로 다를 게 없다. 하늘 대신 해가 있고, 검고 노란색이 붉은색으로 바뀐 정도다. 그런데 마지막 ‘하타’에서 모든 것이 뒤집힌다. ‘하타’는 ‘깃발(旗)’이란 뜻으로 붉은 해는 하늘이 아니라 일장기 위에 그려진 태양이었던 것이다.

붉은 해는 천황가의 원조인 ‘아마데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하늘을 비추는 태양의 여신)’다. 이 땅에서 제일 높은 것이 황제(皇帝)인데, 일본의 천황(天皇)은 하늘까지 다스리는 존재라 하여 ‘하늘 천(天)’자가 붙어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랴”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 그들은 일장기로 하늘을 가려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단순한 식민지 교육이 아닌 것이다.

‘히노마루노 하타’를 배운 아이들에게 내일 뜨는 아침 해는 천황의 것, ‘아마데라스 오미카미’가 뜨는 것이다. 일본(日本)이란 나라 이름부터가 해(日)의 근본(本)에서 온 말이다. 말은 무섭다. 문자는 더 무섭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겠다. 대정 8년에 일본 문부성(文部省)에서 발행된 소학교 국어책 일 권에는 첫 장에 딱 두 글자 “ハナ(꽃)”다. 인류보다 먼저 지구에서 살았던 네안데르탈인들도 죽은 자에게 제물로 바쳤다는 그 꽃이다. 그런데 삽화는 그냥 꽃이 아니라 벚꽃이다. 일본말의 ‘하나(꽃)’는 그냥 꽃이 아니라 벚꽃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부시(武士)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요, 사쿠라(벚꽃)가 아니면 꽃이 아니라는 에도 시대의 관념을 강화해 ‘하나(花)’를 ‘하타(旗)’로 바꿔 놓은 것이 내가 처음 배운 글자요, 그 일장기였던 것이다.

천지현황을 외우는 서당 아이들이 중화(中華)의 이념을 일평생 몸에 달고 다니는 것처럼 ‘히노마루노 하타’를 외우는 ‘국민학교’ 아이들은 야마토(大和)의 천황주의에 못 박혀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자문』을 배운 아이들은 파란 하늘을 보고도 하늘을 검다(玄)고 하고, 초록색 초원을 보면서도 땅을 노랗다(黃)고 한다. 그리고 ‘아카이 히노마루(붉은 일장기)’를 배운 아이들은 해를 그리라고 하면 동그라미에 빨간 칠을 한다. 그걸 보면 서양 아이들은 기절을 한다. 예외 없이 주황색을 칠해 오던 아이들이니까.

일장기의 ‘붉은 해’와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의 ‘하얀 해’가 혈전을 벌인 것이 청일전쟁이다. 천지든, 태양이든 제 눈으로 보고도 그것이 딴 색으로 보이는 것은 그게 자연색이 아니라 이념의 색들이었기 때문이다. 천지현황의 검은색과 노란색은 음양오행의 이념에서 나온 색이고, 일장기의 붉은색과 청천백일기의 흰색은 근대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낳은 빛이었다. 여간 주의(注意)하지 않으면 주의(主義)의 이념 색에 가려 자연색을 볼 수 없는 눈뜬 장님이 된다.

금붕어는 노랗지 않은데도 귀한 물고기라는 뜻에서 황금자가 붙었다. 그래서 빨간 붕어를 보고서도 우리는 금붕어라고 한다. 삼학년 때였던가. 유리 조각에 그을음을 묻히고 개기 일식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이념의 해가 아닌 물리적인 해를 볼 수 있었다. 조금씩 까맣게 침식되어 가며 죽어가는 태양…. 해가 이데올로기의 깃발 속으로 들어오면 일식처럼 암흑이 되어 죽는다는 슬픈 진리를 보았다. 물론 무의식 속에서 말이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는 ‘국기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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