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혼란만 부른 기름 공급가격 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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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지난주 휘발유·경유 등 석유제품의 정유사별 주유소 공급가격이 처음 공개됐다. 석유류의 공급가격이 일반에 알려지면 기름값을 낮출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서 나온 정책이다. 그러나 막상 공급가격이 공개되자 기름값이 떨어지기는커녕 소비자들에게 혼란만 불러일으켰다.

공급가격이 낮은 정유사의 제품이 일선 주유소에선 더 비싸게 팔리고, 공급가격이 높은 회사의 제품은 싸게 팔리는 엉뚱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 같은 왜곡이 일어난 이유는 공개된 공급가격이 지역이나 영업전략의 차이를 따지지 않고 전국에 공급한 기름값을 단순 평균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소비자는 소비자 가격이 터무니없이 높다고 불만이고, 정유사와 주유소는 실제 이익이 별로 많지 않은데도 폭리를 취하는 것으로 비춰지게 됐다고 볼멘소리다.

우리나라 석유제품 시장은 사실상 완전경쟁 시장이다. 정유사 간, 그리고 주유소 간 치열한 경쟁을 통해 최종 소비자 가격이 결정된다는 얘기다. 담합을 하지 않는 이상 폭리를 취할 수 없는 구조다. 정유사의 공급가격에는 공장에서의 거리에 따른 운반비 차이와 공급량에 따른 단가 차이, 주유소 소재지의 경쟁 상황, 정유사별 유통구조가 모두 반영돼 있다. 일률적으로 공급원가를 따지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런 사정을 무시하고 정유사별 공급원가를 공개하겠다는 것은 전형적으로 포퓰리즘에 휘둘린 탁상공론식 정책이 아닐 수 없다.

가격 공개 방침은 국제유가가 급등하던 지난해 국내유가 안정 대책의 일환으로 나왔다. 기름값 상승의 책임을 온통 정유사와 주유소의 폭리 탓으로 돌려 소비자들의 불만을 호도하겠다는 발상이다. 그러나 이런 여론재판식 가격통제 정책은 성공할 수도 없거니와 오히려 경쟁을 제한하는 역효과만 부를 뿐이다. 이 정부는 지난 정부 때 무리하게 추진했던 아파트 원가공개 정책이 숱한 부작용만 남긴 채 실패했다는 데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모양이다. 정부는 이제라도 쓸데없이 반기업 정서만 부추기는 공급가격 공개 정책을 철회하기 바란다. 소비자는 정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