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후손 스베틀라나 김, 러시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전업작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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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4세인 스베틀라나 김이 7일 미 의회도서관 주최로 열린 행사에서 자신의 저서 『백옥과 나(White Pearl and I)』를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18년 전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올 때만 해도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는데 주식중개인을 거쳐 지금은 영어로 글을 쓰는 전업작가가 됐어요. 저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1900년 기근을 피해 러시아로 이주했던 ‘고려인’의 후손인 스베틀라나 김(41)씨가 미국 워싱턴DC 소재 의회도서관 주최로 7일 열린 ‘아시아·태평양 미국인 역사의 달’ 행사에 강연자로 초청됐다. 고려인 4세인 김씨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저서 『백옥과 나(White Pearl and I)』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책 제목의 ‘백옥’은 김 씨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는 할머니의 이름이다. 할머니는 평소 손녀에게 “큰 꿈을 가져라”고 격려했다. 김씨의 미국행은 큰 꿈을 펼치기 위한 첫 걸음이었다.

1991년 12월 당시 23살이던 김씨는 옛소련이 무너진 직후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는 “달랑 비행기 티켓과 현찰 1달러를 들고 시작한 모험이었다”라고 말했다. 뉴욕에서 우연히 미 서부행 버스 티켓을 얻은 김씨는 우여곡절 끝에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했다. 청소·잔심부름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 증권업계에 입문하는 기회를 잡게 됐다. 김씨는 “처음에는 월스트리트 저널에 실린 주식시세표가 무슨 암호처럼 보였다”며 “시세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된 뒤 뮤추얼펀드·주식·채권을 공부했고 이를 바탕으로 주식중개인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제 영어와 러시아어· 독일어 등 3개 언어를 구사하는 김씨는 “유감스럽게 한국에 가 본 적도 없고 한국말도 하지 못한다”면서도 “한국계로서 자긍심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1937년 교과서를 포함해 모든 한국어 서적을 불태우도록 지시했을 때 자신의 할머니는 우리 말과 문화를 지키기 위해 노랫말을 공책에 적어 자녀들에게 가르쳤다고 소개했다.

김씨는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다”라고 전제하면서 “저서 『백옥과 나』가 할리우드에서 조만간 영화화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현재 주식중개인은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활동하면서 두 번째 저서를 집필중이다. 앞으로 향수 사업에 뛰어들 계획도 세우고 있다.

김씨의 이름 스베틀라나는 러시아어로 ‘빛’이라는 뜻. 김씨는 “앞으로 돈을 많이 벌어 빌 게이츠 같은 자선사업가가 돼 ‘사회의 빛’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러면서 “그래도 나처럼 비행기 티켓과 1달러만 갖고 미국으로 건너오는 일은 권하고 싶지 않다”는 농담으로 청중을 웃겼다.

그는 지난해 아시아학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미 행정부에서 교통장관을 지낸 일본계 노먼 미네타, 노동장관을 맡았던 중국계 일레인 차오와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워싱턴 지사=송훈정 기자 HunS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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