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즐겨읽기] 빈혈 걱정해 애인 피 아껴 먹는 뱀파이어라니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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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파리한 낯빛의 뱀파이어가 가냘픈 여인의 우윳빛 목덜미에 차디찬 송곳니를 박아 새빨간 선혈이 흘러내리는 장면은 공포스럽기보다 관능적이다. 여인은 고통스러워 하는 것인지 쾌락에 몸을 떠는 것인지 헷갈린다. 생명의 정수(精髓)인 피를 탐닉하고 내주는 자가당착적인 쾌락. 뱀파이어 이야기가 끊임 없이 영상으로, 책으로 반복 재생산되는 현상은 이런 전도된 매혹이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한 여인에 대한 정념만을 불태우는 ‘정통’ 드라큘라 스토리는 21세기 독자들에게는 철지난 유행가일 뿐이다. 요즘은 판타지·미스터리 등 장르적 재미를 더한 ‘퓨전’ 뱀파이어 이야기가 새 흐름이다. ‘영화나 드라마로 선보인 원작 소설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최근 출판 공식에 따라 영상과 보조를 맞춰 출간하는 현상도 두드러진다.

‘B급 영화’ 제목을 연상시키는 제목의 신간은 그런 ‘두 박자’를 충실하게 따른 작품이다. 우선 영상과의 보조. 섬뜩한 긴장을 선사하지만 잔혹하지는 않은, 이른바 ‘코지(편안한) 미스터리’를 20년 넘게 써 온 작가는 직전 작품 『어두워지면 일어나라』로 미국 영상 산업계에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 ‘트루 블러드’라는 제목의 TV 드라마로 만들어져 수 백 만명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요즘 뱀파이어 소설은 영화나 TV 드라마 방영과 함께 출간된다. 사진은 영화 트와일라잇의 한 장면. 역시 소설로도 출간됐다.

주인공 이름에서 딴 ‘수키 스택하우스’ 시리즈(8권까지 출간)의 두 번째 작품인 신간 역시 드라마로 만들어져 다음달 전파를 탄다. 국내에서 볼 수 없는 게 안타까울 정도다. 실제로 신간은 매 장면 영상이 연상될 정도로 시각적이다. 그러니 빨리 읽힌다.

소설은 압축하면 로맨틱한 뱀파이어 이야기다. 공간 배경은 인종적 편견이 뿌리 깊은 미국 남부 루지아나주의 소도시. 시간 배경은 딱히 언급이 없으니 ‘지금, 현재’로 봐야겠지만 2년 전 뱀파이어가 합법화된 상태다. 단 아직까지 뱀파이어와 인간간 결혼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어쩐지 ‘뱀파이어’ 대신 ‘게이’나 ‘불법체류자’를 집어 넣어도 무리 없이 읽히는 분위기다.

사람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진 여인 수키 스택하우스와 뱀파이어인 빌 콤프턴 간의 사랑 이야기를 바탕으로 마을의 의문사를 추적해 나간다. 와중에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를 섬기는 초능력자가 등장하고, 주류 사회로 편입하려는 대다수 순치된 뱀파이어들과 이에 반대하는 ‘근본주의’ 뱀파이어들이 대립한다. 빌은 마초적이기보다는 섬세하다. 사랑하는 여인의 피를 한꺼번에 먹어치우기보다 빈혈을 걱정하며 ‘아껴 마시는’ 쪽이다. 감동적이기보다는 시간 보내기용으로 적당한 신세대 뱀파이어 얘기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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