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탐구] 이영애, 카메라 앞에선 무서운 집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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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헵번 스타일이란 머리 모양이나 옷차림 같은 외모가 아니라 나이가 들수록 아름다움을 더해 가는 내면의 모양새를 일컫는 말이어야 하지 않을까. 누구보다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여배우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던 젊은 날의 오드리 헵번보다 나는 노년의 그녀가 더욱 아름답게 여겨진다.

매끄럽게 빛나던 흰 목은 어느새 굵은 주름이 잡힌 채 축 늘어지고 날렵했던 몸매는 이제 앙상하게 말라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배우로서의 나의 노년은 어떤 모습일까

나 역시 주름살 가득한 모습으로도 젊은 날과 변함없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배우가 되었으면."(이영애 에세이 '아주 특별한 사랑' 중)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다. '산소같은 여자'라는 CF 카피로 CF 퀸에 오른 이영애는 드라마·영화까지 최고가 됐다. 깨끗함과 신선함, 단아함과 고급스러움이 그의 이미지다.

거기에 파격을 주면 그 충격은 더 크다. 도발이고, 유혹이다. "라면 먹고 갈래요?"(영화 '봄날은 간다') "너나 잘 하세요"(영화 '친절한 금자씨') 등의 유행어가 만들어지는 이유다. 사이코패스가 준 충격도 같은 원리다. 이영애가 뿜어내는 도시적 매력의 진폭이다.

카메라 돌아가면 정말 무섭다
촬영 30분 전에 현장에 도착하고, 마음에 들때까지 다시 찍는 성실함, 촬영장에서도 시간 날 때마다 다른 사람과 대화 없이 책을 읽는 조용함, 지인들을 챙기는 세심함 등이 이영애를 아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부분이다. 보이는 대로 평소에 있는 듯 없는 듯 하지만, 카메라가 돌아가면 무섭게 질주하는 배우다. CF 데뷔 시절부터 그런 성향은 농후했다.

이영애는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랐지만 초등학교 4학년이던 10살 때 참고서 모델을 할 정도로 끼도 있었다. 공식 데뷔는 1990년 대학 2학년 때 홍콩 배우 유덕화와 함께 출연한 투유 초콜릿 CF.

이를 계기로 1991년 마몽드 화장품 CF 모델로 발탁됐다. 마몽드는 전부터 알려지지 않은 신인을 발굴해 그 모델을 키우면서 같이 브랜드도 커가는 전략을 채택했다.

이 CF를 통해 이영애는 '산소 같은 여자'가 됐다. 마몽드와는 그 후로 8년을 더 일했다. 이영애는 부단히 관리를 통해 청정 모델의 이미지를 유지해 왔다.

당시 제작진이었던 김경태 한국광고원장이 털어놓는 마몽드 CF의 에피소드 하나. 호주 촬영중 이영애가 오픈카 자동차를 타고 해안가를 달리는데, 해안 도로에 한 쪽은 산이고 한쪽은 깎아진 절벽이었다. 그 아래가 바다여서 무척 위험했다. 당시 이영애는 운전할 줄 몰랐다.

촬영진이 대역을 쓰자고 했지만 이영애는 자신이 하겠다고 고집했다. 촬영을 준비하는 3일 동안 이영애는 현지에서 운전 연수를 받고 직접 촬영을 끝냈다.

드라마 도전, 이영애의 정체성을 찾아서

'산소 미인'이란 별칭을 얻은 이영애는 1993년 SBS TV 드라마 '댁의 남편은 어떻습니까?'로 연기에 도전했다. 이 드라마에서 신세대적인 이미지가 강한 도도희 역으로 데뷔했다. 초기의 이영애는 미모에 비해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꾸준히 변신을 시도했다.

1997년 MBC TV '의가형제'에서 이지적이고 도도하지만 천상 여자일 수밖에 없는 여의사 역을, MBC TV '내가 사는 이유'에서 술직 작부 역을 차례로 소화했다. 1999년 KBS 'TV 드라마-은비령'에서 남편을 잃은 여자로 발랄하고 상큼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무겁고 깊이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2000년 SBS TV 드라마 '불꽃'에선 파격적인 불륜 연기를 하며 파격적으로 연기 변신을 했다. 물론 연기력 논란을 완전히 벗어 버릴 수는 없었고, 1997년엔 '인샬라'로 영화 데뷔를 했으나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영애 스스로도 슬럼프였다고 꼽는 시기다.

은밀한 유혹 - "라면 먹고 갈래요?"

이영애는 2001년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은밀한 도발적 매력을 뿜어냈다. 그걸 집약하는 말이 이 영화로 유행어가 된 "라면 먹고 갈래요?"이다. 지방 방송국 PD 은수(이영애)가 상우(유지태)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유혹할 때 사용한 대사다.

은밀히 페로몬을 뿌리는 남녀의 구애를 이처럼 한국적으로 표현한 대목이 있을까. 이영애는 사랑 앞에서 흔들리는, 결국 사랑의 상처 때문에 마음을 받아 여성의 마음을 미묘하게 연기해 냈다. 이영애의 연기가 재평가 받는 순간이었다.

2000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눈길을 끄는 연기를 한 이후 이영애의 본질적인 매력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박찬욱 감독은 '봄날은 간다'를 보고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이영애를 통해 자신이 끌어내지 못한 부분을 발견하고 이영애 캐스팅을 전제로 '친절한 금자씨'를 기획했다.

도전적 여성상 - "미각을 잃었습니다"

이병훈 PD의 MBC TV 드라마 '대장금'은 이영애를 한류 스타로 올려놓았다. 이 PD는 대장금 캐릭터 창조를 위해 중량감있으면서도 늘 방송에 등장하지는 않던 배우를 물색했고, TV로는 '불꽃' 이후 3년, 영화로는 '봄날은 간다' 이후로 2년의 공백을 가진 이영애를 선택했다. 결과는 완전히 성공적이었다.

이영애는 사극이라는 장르를 통해 능력 있는 여성이 남성들의 사회를 바꾸어 나가는 모습을 속 시원하게 그려냈다. "미각을 잃었습니다" 등의 대사도 유행어가 됐다. 중동·아프리카 등 세계 60개국 이상에 수출된 '대장금'에서 이영애는 '일하는 여성'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천사와 악마의 유혹 - "너나 잘 하세요"

2005년 박찬욱 감독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의 변신은 충격적이었다. 이영애는 천사와 악마의 양극단을 오갔다. 그것은 "너나 잘 하세요"라는 대사 한 마디로 응축됐다. 산소같은 여자의 이미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연기였다. 파격이었다.

금자씨는 이영애적이면서도 이영애를 넘어서는 새로움을 보여주었다.

박 감독은 "금자 역은 이영애가 아니었으면 좀 더 드러내놓고 폭력적인, 공격적인 성격을 표현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영애에게 맞춰서 썼기 때문에 전혀 안 그럴 것 같이 행동하다가 막판에 가서 무셥게 변하는 인물이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친절한 금자씨' 이후 이영애의 공백은 4년 째다. 드라마와 영화 대본을 다 같이 검토 중이다. 그는 앞으로 어떤 유혹을 보여줄 것인가.

장상용 기자 [enise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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