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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현 새 두산 회장의 조용한, 그러나 거대한 행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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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브스코리아 박용현 회장이 재계 10위의 두산호 선장을 맡았다. 그는 서울대 병원장 출신이다. 의료계에서는 명성이 자자하지만 재계에는 알려진 게 그리 많지 않다. 박 회장과 그리고 그가 이끌 두산의 미래를 탐구했다.

박용현(66) 두산 회장은 부드럽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다. 3월 27일 지주회사로 전환한 두산의 회장에 취임했지만 아직도 그를 병원장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회장 취임 때도 떠들썩한 행사나 언론 홍보를 가급적 피했다. “그룹의 현안을 파악하고, 새로운 행보가 가시화 될 때까지 언론과의 인터뷰는 당분간 사양하겠다”는 방침을 홍보팀에 특별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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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조용한 행보 뒤에 거대한 야망과 결연한 의지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은 불문가지다. 새 공식 직함은 두산 회장이지만 두산이 나머지 회사를 자회사, 손자회사로 거느리게 되는 만큼 두산그룹 회장이라는 직함과 호칭이 더 어울린다. 3월 30일 취임식 때도 그는 두산의 야심만만한 미래, 그의 거대한 디자인을 강하게 암시하는 취임사를 했다.

그는 우선 “두산은 한국에서 가장 긴 113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기업”이라고 운을 뗐다. 두산은 공식적으로 1933년 12월 18일 소하기린맥주주식회사 설립 날짜를 창업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실제 두산의 역사는 18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 8월 1일 박 회장의 조부 박승직은 종로4가 베오게에 면직물을 거래하는 ‘박승직상점’을 세웠다.

박 회장 취임사의 모두(冒頭)는 ‘박승직상점이 한국 근대사의 최초 회사이며, 지금의 두산은 그 위대한 역사적 계보를 도도히 승계하고 있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조부가 사업을 시작한 지 113년이 지난 오늘, 두산의 그 ‘순혈적 정체성’의 중심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당당히 선언한 것이다.

그는 취임사를 통해 임직원들에게 “새로운 100년을 써 나가자”는 당부를 했다.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고, 재무적으로 건실한 체제를 구축하며,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거듭나자는 메시지였다. 부드러우면서도 통이 크고, 통이 크면서도 섬세하며, 섬세하면서도 공격적인 그의 경영 철학을 암시한 대목이다.

박 회장이 그룹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두산 오너 일가의 전통인 ‘형제경영’ 순서에 입각한 것이다. 박두병 선대 회장의 장남인 박용곤 명예회장, 차남 박용오 성지건설 회장, 3남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에 이어 4남 박용현 회장에게 바통이 이어진 것이다. 박 회장이 보듬어야 할 두산그룹 전체 직원 수는 약 3만5000명이다.

두산건설 회장 시절 1100여 명의 직원과 비교할 때 앞으로 책임져야 할 직원 수가 무려 32배로 늘었다. 두산건설 회장과 연강재단 이사장직에서 26개 계열사를 진두지휘 해야 하는 그룹 총수로 거듭난 그의 어깨는 무겁기만 하다. 회장 등극의 기쁨보다 재계 10위의 거대 그룹을 글로벌 기업으로 약진시켜야 할 부담이 훨씬 크다.

‘두산 페미니스트’라는 별명

박 회장은 두산가(家) 제3세대의 일원으로 경기고와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다. 자녀 교육을 특히 강조하는 두산가의 전통이 가장 상징적으로 실현된 대표적인 케이스가 박 회장이다. 박 회장의 선친인 박두병 초대 회장은 “도둑이 와서 재물은 훔쳐갈 수 있지만, 머리에 들어 있는 것은 절대 훔쳐갈 수 없다”며 자식들에게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박 회장은 76년 서울대 의대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2004년 서울대병원장을 그만둘 때까지 30년 가까이 서울대를 떠나지 않았다. 간장, 담낭(쓸개), 담도, 췌장, 비장 등을 다루는 간담췌외과를 전공했고, 박사 학위 논문으로는 ‘간 재생에 관한 실험적 연구’를 썼다. 병원장을 맡기 전에는 기획조정실장 등 행정보직을 맡아 서울대 병원의 경영 전반을 책임지기도 했다.

그는 98년 병원장을 맡으면서 그의 피에 녹아 있는 경영자로서의 본능과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병원장 시절 그는 수많은 경영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경영학 교수와 경영 컨설턴트를 만나 서울대병원의 개혁 방향을 구상했다. 서울대병원은 그의 경영 능력과 마인드를 테스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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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울대병원의 관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분위기를 싫어했다. 병원장이 되자마자 메스를 들고 병원 혁신을 주도했다. 병원장 시절 그는 “조직원의 의식 변화, 서비스 향상, 환자 중심의 병원”이란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를 보좌했던 한 서울대 의대 교수는 “조직 통·페합과 보직 임기제를 도입해 철밥통을 깨뜨린 것은 굉장한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의사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조직 통·페합을 통한 강력한 구조조정을 단행해 관료주의에 젖은 병원 분위기를 일대 쇄신했다. 당시 그는 “모든 조직은 효율성이란 덕목을 무시해선 안 된다. 서울대병원도 예외는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병원 개혁을 진두지휘 했다. 서울대병원에 기업경영 마인드를 접목시켰고, 적자를 면치 못했던 수익성도 개선했다.

그가 병원장으로 재직했던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서울대병원은 3년 연속 병원 브랜드 파워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공익성 강화’라는 대의명분도 “재원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건강증진센터, 서울대 분당병원 건립도 그의 이 같은 경영 마인드의 소산이었다.

검진센터에서 나오는 수익이 소아병원과 임상학연구소 등 공익 목적에 전액 사용됐지만 그는 검진센터 건립이 ‘수익성을 고려한 사업’이라는 점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전문 코디네이터의 보조로 명품 건강진단을 받는 역삼동 센터의 검진 비용은 200만 원을 훌쩍 넘었다. 현재 역삼동 스타타워빌딩에 입주한 서울대병원 강남센터는 명품 건강진단 병원으로 높은 성가를 얻고 있고 서울대병원의 재정에도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병원장 시절 박 회장은 “정부 보조금은 총예산의 1% 내외에 불과하고, 7000명의 병원 식구가 먹고 살아야 하니 허리끈 졸라매고 정신 차려야 한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는 유난히 ‘현장주의’에 집착했다. “호텔 경영보다 더 어려운 것이 병원 운영”이라며 “최고의 진료 기술에 호텔과 같은 서비스를 추가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모든 문제가 현장에 있고 해결책도 현장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의사들이 회의실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경향이 있다”는 질타가 이어져 당시 서울대병원은 비상에 걸린 군부대 같았다. 삼성, 현대 등 대기업 병원의 엄청난 자본에 맞서기 위해 서울대병원의 잠재력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의 개혁은 공공 병원 개혁의 모델이 됐고, 덕분에 서울대병원의 체질은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다. 2004년 5월 그는 임기를 3년 남긴 채 병원장직을 물러났다. “후학을 위해 길을 터준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가 본격적인 경영 수업기에 들어갔다는 관측이 유력하게 나돌았다. 당시 그는 서울대 의대 동기들에게 보낸 ‘28년 9개월 만의 외출’이란 글을 통해 퇴임의 감회를 밝혔다.

그는 “병원 보직 11년간 오로지 병원 행정에만 정열을 쏟다 보니 교수 본연의 임무인 교육과 연구, 진료는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떠나는 게 당연하다”고 썼다. 재계는 당연히 그의 차후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2005년 형제간 다툼으로 박용성·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이 불구속 기소되고, 그룹이 지배구조 개선에 나서면서 그룹의 새 얼굴로 박 회장이 나서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됐다.

당시 박 회장은 “두산그룹은 그룹 회장제를 폐지하고 전문경영인 체제를 통한 지주회사로 전환된다. 그룹 회장을 맡는 일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의사 출신 최고경영자도 많고 거대 조직인 서울대병원을 이끌면서 경영 수업을 많이 쌓았다”며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번 회장 취임의 숨은 복선이 2005년 무렵부터 깔린 셈이 됐다.

2005년 11월 두산그룹 내 학술장학재단인 연강재단 이사장에 취임한 그는 두산의 사회공헌 활동을 총괄하면서 소위 ‘지속 가능 경영 마인드’를 쌓기 시작했다. 연강재단 이사장 시절, 그는 두산아트센터에 250억 원을 투입해 리모델링 하며 국내 두 번째의 뮤지컬 전용극장을 지었다. 기존 400석 규모의 연강홀을 620석 규모의 뮤지컬 전용극장으로 확장하고 여기에 230석 규모의 공간 가변형 소극장과 두산 갤러리를 새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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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 극장이 두산 메세나 사업의 ‘전진기지’라고 치켜세웠다. 그는 두산아트센터를 리모델링 하면서 여자 화장실에 특히 세심한 배려를 했다.

화장을 다시 할 수 있는 파우더 룸과 가방 수납 공간을 갖춘 이 쾌적하고 우아한 여자 화장실의 변기 수는 무려 52개에 달했다. 이처럼 고품격 여자 화장실을 만든 후 그는 ‘두산 페미니스트’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는 찾아온 손님의 손목을 잡고 여자 화장실을 직접 안내하며 “앞으로 우리 극장에서 화장실 앞에 줄 선 여성 관객의 모습은 없다”고 자랑하곤 했다. 연강재단 이사장 시절 그는 매년 20억 원 정도의 적자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모자라는 운영비는 두산그룹 계열사들이 사회공헌 차원에서 지원했다.

박 회장 스스로 “97년 외환위기 때 공중분해 될 뻔하다 구조조정 잘해서 살아남지 않았느냐. 그때 국민에게 신세 진 것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는 2007년 3월부터 2년간 두산건설 대표이사 사장을 맡으며 경영자로서의 본격적인 이력을 쌓기 시작했다. 두산중공업 박용성 회장이 그를 이 자리에 밀었다.

박용성 회장은 동생을 두산건설 대표이사로 앉히면서 측근들에게 말했다. “내 동생은 의사지만 장사꾼 기질이 있다. 서울대병원을 뒤집는 걸 잘 보지 않았느냐.” 건설부문 대표를 맡자마자 박 회장은 두산건설의 해외 진출 드라이브를 주도했다. 러시아 법인, 아랍에미리트(UAE) 지점을 설립했고 취임 전 15위 도급 순위를 11위까지 끌어올렸다.

그룹의 크고 작은 인수·합병(M&A)을 이끌면서 2008년 중앙대 인수 과정에서도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여자 화장실을 챙길 만큼 섬세하면서도 공세적인 경영, 통이 큰 추진력의 일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두산 측은 건설 부문 대표 시절 박 회장의 성과를 거론하며 경험 부족에 대한 내외의 우려가 기우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박용현 회장 체제가 성립되면서 두산은 ‘오너 경영’을 더욱 강화했다. 사내 이사 7명 중 5명이 오너 일가로 채워진 것이다. 신임 사내 이사로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 박용현 회장, 이재경 두산 부회장, 박지원(朴知原·44) 두산중공업 사장을 선임했으며 임기가 만료되는 박정원(朴廷原·47) 두산건설 신임 회장도 이사로 재선임했다.

기존의 두산 사내 이사로는 박용만(朴容晩·54) 두산인프라코어 회장과 제임스 비모스키 두산 부회장이 있어 전체 7명의 사내 이사 중 오너가 아닌 사람은 이재경 부회장, 제임스 비모스키 부회장 등 두 명뿐이다. 재계 일각에서는 박 회장의 두산이 일종의 ‘집단지도체제’에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두산의 조용한 변신을 이끌겠다”는 최근 발언도 급격한 개혁이나 변신보다 전체의 조율과 합의에 의한 그룹 경영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박 회장의 취임이 두산그룹 오너 4세 체제로의 순조로운 이행을 위한 것이라 관측하기도 한다. 박 회장이 두산건설에서 그룹 회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4세 장손인 박정원 회장(박용곤 명예회장 장남)이 두산건설 회장에서 새 대표이사 회장으로 취임한 것을 주목하고 있다.

두산의 4세 그룹의 선두가 3세 그룹인 삼촌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의미다. 박 회장은 중후함과 소탈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옷 맵시를 자랑한다. 2001년에는 맞춤양복협회가 선정한 베스트 드레서에 뽑히기도 했다. 코디를 스스로 할 정도로 감각이 좋고 스스로 “옷 잘 입는 사람을 보면 꼭 기억해 나중에 옷을 입을 때 참고한다”고 말할 정도로 눈썰미가 뛰어나다.

평소 “패션은 남을 위한 배려며, 그 자체로 내가 몸 담고 있는 조직의 이미지”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 박 회장은 골프 구력이 무려 50년이 넘는다. 50년대 초 초등학교 다닐 때 선친과 함께 필드에 나갔다. 선친이 쓰던 채를 직접 자르고 가죽으로 그립을 감아줬다고 한다. 그러나 중·고등학교와 미국 유학 시절을 건너 뛰어 제대로 친 것은 80년대부터다.

드라이브 샷의 비거리는 그리 길지 않지만 아이언의 정확도가 놀랍고 퍼트도 정교하다. 잘 어울리는 골프 웨어에 단정하고 깨끗한 스윙 폼이 영락 없는 ‘필드 위의 신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박 회장의 단정하고 깨끗한 패션과 스타일이 경영 현장에서도 걸맞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지난해 두산은 2007년 인수한 소형 건설장비업체 밥캣의 실적 부진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이로 인해 하루 동안 시가총액 기준으로 2조1000억 원이 줄어 그룹 전체가 ‘유동성 위기설’에 휩싸이기도 했다. 두산은 알짜 기업 계열사 매각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출판사업, 테크팩, 주류업 등을 매각해 유동성 논란을 잠재우는 동시에 투자 자금까지 확보했다.

구조조정으로 마련한 자금으로 원천기술 확보에 주력해 중공업 분야 경쟁력을 더욱 강화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두산의 미래를 짊어진 박 회장에게는 위기와 기회가 공존하고 있다. 두산의 주력 업종인 인프라 지원 사업이 만만치 않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 위기의 일단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소비가 위축되면서 설비 투자 역시 급격하게 줄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기침체 역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두산의 원천기술 확보를 위한 행보는 장기적 계획 아래 흔들림 없이 진행돼 왔다. 위기를 뛰어 넘어 약진할 수 있는 베이스 캠프다. 두산은 박 회장 취임 전 원천기술을 갖고 있는 국내외 유력 기업을 다수 M&A 했다. 신재생에너지 사업, 풍력 및 연료 전지 사업 등 저탄소 그린산업 분야에서도 원천기술을 확보, 상용화를 서두르고 있다.

해수 담수화 중심에서 물 관련 수처리 사업 전반으로 사업 구성을 확대하고 있는 점도 고무적이다. 금융 계열사인 두산캐피탈은 중국 굴삭기 금융 서비스 사업을 계기로 2012년까지 금융자산 5조 원의 종합 여신전문 금융회사로 도약한다는 계획이다. 박 회장에게는 이미지 트레이닝이 필요하다.

IMF 위기를 겪으며 그룹 체질을 바꾸고, 업그레이드에도 성공한 경험을 되살려 보는 것이다. 이번 글로벌 위기가 두산이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하는 시발점이 될 수 있을지 재계와 국민의 시선이 쏠려 있다. 베스트 드레서가 베스트 CEO가 되는 길은 아마도 평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그가 두산 전체를 휘어잡고 혁신을 주도할 카리스마형 리더가 되는 과정 자체가 만만치 않은 시련과 도전을 내포하고 있다.

글 한기홍 포브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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