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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적 정보전달 수단”VS “허술한 속임수 마케팅”

중앙일보

입력

이코노미스트 “준비한 상품이 얼마 남아 있지 않습니다. 주문을 서두르셔야 할 것 같네요.” “(안타까운 표정으로) 품절됐습니다.” 지금이야 업체 간 자정 결의를 하면서 사라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TV 홈쇼핑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장면이다. 이름하여 ‘마감 임박 마케팅’. 그런데 최근 들어선 자사 제품을 설명하면서 ‘또 다른 자사 제품’과 비교하는 장면이 자주 눈에 띈다. 이른바 ‘비교 마케팅’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왜 자사 제품일까? 그 자사 제품은 언제, 어떻게 유통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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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호스트가 불에 달군 신제품 프라이팬(좌)과 자사 기존 프라이팬(우)에 비닐이 눌어붙는지 비교 시연하고 있다. 일반 자사 팬에 대한 제품 설명이나 비교 조건 등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에 사는 주부 김소영(36)씨는 평소 TV 홈쇼핑 채널을 즐겨 본다. 상품을 많이 사는 편은 아니지만 정신없이 바뀌는 화면과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쇼핑 호스트의 코멘트가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에 딱이라서다.

경쟁 제품과 비교 부담감으로 ‘구닥다리’ 옛 상품과 대조…“중학생을 초등생과 일렬로 세워놓고 비교하는 격”
TV 홈쇼핑 ‘자사 제품 비교’의 진실

그런데 최근 김씨는 TV 홈쇼핑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새로 판매하는 프라이팬에 대해 잘 눌어붙지 않아서 좋다면서 ‘기존 자사 제품’과 비교하더라고요.

아무 상표도 없는 기존 제품은 달걀이 눌어붙고, 양념이 타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러고 보니 며칠 전 다른 홈쇼핑 회사에서도 마스크 팩을 판매하면서 에센스가 줄줄 흘러내리는 ‘기존 제품’과 비교하더군요. 그럼 그 회사에서 예전에 제품을 구입한 사람은 바보인가요?”

김씨가 의문을 갖는 ‘자사 제품 비교’를 요즘 TV 홈쇼핑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런 방식은 주로 프라이팬·화장품·의자·면도기 같은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데 자주 이용된다. 화려한 ‘신상(신상품)’ 앞에 품질을 저울질 당하는 기존 제품은 ‘이름’도 ‘성’도 없다.

그저 ‘일반 자사 제품’ 혹은 ‘자사 기존 제품’ 등으로 불릴 뿐이다. TV 홈쇼핑 업체 내부에서도 ‘자사 제품’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를 납품하는 제조업체와 상품기획자(MD) 정도가 그 이력을 알고 있는 정도다. 그러면 왜 홈쇼핑 업체들은 일부 담당자가 아니면 이해하기도 어려운 마케팅 방식을 선택한 것일까?

익명을 요구한 한 홈쇼핑 벤더(중간 판매업자)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TV 홈쇼핑의 특성상 눈에 보이는 ‘비주얼’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비교 대상 제품의 기능·디자인이 떨어질수록 새로 팔고 있는 신제품이 돋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사 제품과 냉정한(?) 비교를 통해 신상품의 우수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얘기다.

둘째, 기존 제품을 이미 구입한 소비자에게 ‘재구매 충동’을 느끼게 하는 ‘부수입’도 있다. 실제 과거에 ‘대히트’를 했다가 잠잠해진 제품이 자사 제품과 비교를 통해 ‘제2의 전성기’를 맞은 사례도 있다.

“소비자 이해 빨라서 효과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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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면 팬으로 인기를 끌었던 프라이팬 브랜드 ‘해피콜’은 양면 팬과 프라이팬 세트의 기능을 업그레이드해 최근 TV 홈쇼핑에서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 CJ홈쇼핑에서 판매하는 ‘스킨79’ 비비크림은 색상, 발림성 등을 개선해 판매가 급증했다.

해피콜 제품을 제조하는 프리젠트의 이상진 부장은 “비교 대상 제품은 현재 오픈마켓 등에서 판매하고 있는 제품”이라며 “홈쇼핑에서 기존 제품과 비교 설명하는 방식을 쓰면 제품 업그레이드에 대한 소비자의 이해가 빠르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일반 소비자라면 2~3년 전에 팔렸던 기존 제품이 아닌 현재 팔리고 있는 경쟁사 상품과 해당 상품을 비교하고 싶지 않을까? 그런데 경쟁사 상품과 새로 내놓은 자사 상품을 비교 설명하는 홈쇼핑 프로그램은 단 한 곳도 없다. 겉으론 소비자 이해를 돕는다고 했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TV 홈쇼핑 업체들이 ‘구닥다리’ 자사 제품을 부각시키는 속내는 다른 데 있어 보인다. 바로 ‘타사 제품 비교’가 복잡하고 번거롭다는 인식 때문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통심위)의 ‘상품소개 및 판매방송 심의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타사 제품과 비교는 법으로 허용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기본적인 경쟁 촉진 방안 가운데 하나로 비교 광고를 활성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GS홈쇼핑의 신형범 홍보팀장은 “경쟁사 제품과 비교하면 ‘비방 논란’에 휩싸일 수 있다”며 제품 비교 설명의 어려움을 전했다. 이 회사의 이봉섭 MD 역시 “혹시라도 방송 중에 실수할 수도 있어 타사 제품과 비교는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다른 홈쇼핑 업체들도 비슷한 이유로 타사 제품과 직접 비교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업계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 경쟁 제품과 비교해 자사 신제품의 우월한 기능을 설명하는 것보다 기존 자사 제품보다 업그레이드된 기능을 해설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품도 덜 들고 분쟁의 소지도 막을 수 있다.

더욱이 홈쇼핑 업체로서는 직접 상품을 만들어 파는 것이 아니라 판매의 장(場)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분쟁의 불씨를 떠안을 필요가 없는 입장이다. 그러나 자사 제품 비교의 문제는 또 있다. ‘소비자 편의’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TV 홈쇼핑이 ‘소비자 편의’를 무시하고 있어서다.

현재 비교 마케팅을 활용하는 업체 대부분이 그 비교 대상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제품을 부각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활용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주부 김씨는 “적어도 비교 대상인 제품이 어떤 제품인지는 정확히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곳곳에 ‘빈틈’이 발견된다.

비교가 되는 상품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떤 경로를 통해 팔렸던 것인지 설명이 태부족하다. 하다못해 그 흔한 모델번호 하나 없다. 한 홈쇼핑 업체 관계자는 “출시연도·규격·가격 같은 자사 기존 제품 선정기준이 뚜렷이 없어 필요할 때마다 뚝딱뚝딱 만들어낼 수도 있다”며 자사 제품 비교의 심각성을 귀띔했다.

그는 또 “(한 번도 팔리지 않은 채) 창고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시제품이 자사 제품으로 버젓이 나온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언제든지 출처 없는 ‘희생양’이 탄생할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상품소개 및 판매방송 심의에 관한 규정’ 34조 2항을 보면 ‘상품소개 및 판매방송에서 비교는 판매상품과 동종 또는 가장 유사한 상품을 비교대상으로 하여야 한다’고 나와 있다.

동종 상품인지 유사한 상품인지 소비자가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GS·CJ·현대 등 국내 3대 홈쇼핑에 문의한 결과, GS와 현대홈쇼핑은 방통심위의 공고에 의해 2개월여 전부터 비교 장면이 나갈 때 비교 대상 제품의 ‘출시연도’를 자막으로 내보내고 있다.

지금까지 아무런 표기를 하지 않는 CJ홈쇼핑 측은 “동일한 비교 조건을 만드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꼭 출시연도를 표기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TV 홈쇼핑 업체들의 자사 제품 비교 설명에 대해 ‘눈 가리고 아웅’ 식 판매라고 지적한다.

송보경 소비자 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 이사(서울여대 교수)는 “비교 대상 품목이 정확하게 명시되지 않고 비교 기준이 객관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비교는 소비자를 오도하는 행위”라며 “초등학교 1학년생과 중학교 1학년생을 일렬로 세워 비교해 놓고 그 나이를 알려주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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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통심위, 제재 어려워

송 이사는 이에 대해 “객관성이 결여된 속임수 포장”이라고 비판했다. 방통심위 광고1팀의 김양하 팀장은 “소비자가 비교 장면에 현혹돼 충동구매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홈쇼핑 회사 모두가 비교 제품을 선정하는 기준을 따로 마련해두고 있지 않다.

내부 심의 팀이 있기는 하지만 ‘터무니없는 비교만 아니면 된다’거나 ‘말도 안 되는 제품은 비교 시연하지 않는다’ 같은 모호하고 주관적인 평가 기준이 고작이다. 또 다른 홈쇼핑 업체 관계자는 한술 더 떠서 “자사 제품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내가 담당자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텐데”라며 자기 회사의 판매 방식을 부정하기도 했다.

업계의 내부 자정 기능만 허술한 것이 아니다. 이를 감독하는 방통심위 역시 제재수단이 마땅히 없기는 마찬가지다. 김양하 팀장은 “현재는 업계 관계자가 문의해 올 때 답변해 주는 소극적 수준의 규제를 하고 있다”며 “일일이 제재를 가하거나 적발해내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김 팀장은 이어 “비교 제품에 대한 정보를 명확히 표시하도록 지도할 필요가 있는데 워낙 방송 매체가 많아 현재 모니터 요원으로 전체를 다 커버하기는 불가능하고 앞으로도 완벽하게 제재 조치를 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방통심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예방적 효과라는 얘기다.

1995년 첫 전파를 타면서 30억원대 매출을 올린 TV 홈쇼핑은 현재 4조원대 시장으로 팽창했다. 최근 성장 정체를 겪고는 있지만 아이디어가 뛰어나면서 품질 좋은 중소기업 제품의 판로로 TV 홈쇼핑은 여전히 각광 받고 있다. 여기서 TV 홈쇼핑을 키운 두 가지 키워드가 바로 ‘신용카드’와 ‘신뢰’다.

2000년대 초반 급성장한 신용카드 시장이 TV 홈쇼핑의 결제수단으로 궁합을 맞췄다면, 그 안에는 ‘좋은 상품을 저렴한 가격에 편리하게 살 수 있다’는 소비자 신뢰가 있었다. 송보경 이사는 “수준 낮은 비교 설명 같은 상품 판매 기법이 자신의 신뢰도에 스스로 찬물을 끼얹는 행위가 될 수 있다”며 “오히려 지금은 정직 마케팅이 필요한 순간”이라고 말했다.

송 이사는 아울러 “기업은 법을 교묘하게 피해 가게 마련이라 소비자가 먼저 ‘비교 근거가 무엇인지’ ‘왜 그 제품과 비교하는지’ 묻는 분위기를 형성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결국 기업이 나아지기 전까지는 소비자가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듯하다.

최은경 기자 chin1ch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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