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양쪽에서 버림받은 빨치산, 서사시에 담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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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빨치산을 소재로 한 서사시 ‘달궁 아리랑’을 최근 탈고한 송수권 시인. 그는 “통일시가 필요하다 는 생각에 서사시를 썼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1948년 ‘여순 사건’으로 본격화된 지리산 빨치산 투쟁이 장편 서사시로 되살아났다. 이 큰 작업에 달라붙은 이는 전통적 서정의 세계에 뿌리를 두면서도 분단·통일 등 현실 문제에 관심을 보여온 ‘남도 시인’ 송수권(69)씨다. 지금까지 이병주 장편소설 『지리산』,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등 소설에서는 지리산 빨치산을 다룬 작품들이 더러 있었지만 시로 표현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A4 용지 93쪽 분량 서사시의 제목은 ‘달궁 아리랑’. 제사(題辭·책 내용과 관련 있는 첫 머리 노래나 시)격인 짧은 시 ‘빨치산’(“날아가는 새가 되지 않으려고/밤마다 가슴에 돌을 얹고 잠들었다”)과 서시, 연작시인 ‘달궁 아리랑’ 19편 등으로 구성돼 있다. 송 시인은 6일 전화통화에서 “200자 원고지로 치면 500쪽쯤 된다”고 밝혔다.

서사시는 시의 화자 역할을 하는 가상 인물인 시인이 달궁 에미, 피아골 뱀노인 등 지리산 자락 실존 인물들의 입을 통해 번갈아가며 빨치산 투쟁사를 전하는 형식이다. 송 시인이 꾸며낸 가상 인물인 시인 화자야 논외로 치더라도, 달궁 에미 등 지리산 사람들은 토벌대나 빨치산 어느 한 쪽으로 기울 이유가 없을 텐데 서사시 속에서는 빨치산에 ‘동정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밤손님’이라 불린 빨치산들이 기껏 소나 돼지를 잡아갔다면 토벌대는 죄 없는 사람을 수 백명씩 학살하곤 했기 때문이다.

달궁 에미 스스로도 빨치산에 연루돼 잃은 게 더 많은 인생이다. 딸 길례를 빨치산에 보쌈당해 잃은 데 이어 빨치산에 의해 ‘혁명군의 아들’이라며 맡겨진 손자 윤판은 연좌제를 피해 집을 나간 후 실종된다. 달궁 에미 본인 역시 빨치산의 에미라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당한다.

양적으로 좌·우 균형을 잃은 듯한 모양새에도 불구하고 시속 화자는 결국 빨치산은 남과 북 양쪽 모두에게 버림받은 존재였을 뿐이라고 진술한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1953년 ‘빗점골 전투’에서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하고 나서 하동 송림 모래밭에서 그를 추모하는 조포 세 발을 쐈던 토벌대장 차일혁의 사연이 소개된다. 좌·우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민중적 유대감이다.

송 시인은 연극적 요소, 판소리 가락처럼 술술 읽히는 문장 등을 동원해 힘있는 서사시를 만들었다. 또 ‘시상시상, 섬마섬마, 잼잼잼’ 등 단군 조선 때부터 전해내려 왔다는 아이 어르는 노래, ‘단동치기’를 노래의 후렴처럼 서사시 곳곳에 배치한 덕에 읽는 맛이 쏠쏠하다.

송 시인은 “남과 북 사이 경계인이었던 빨치산을 끌어안지 못하는 한, 한국 문학은 반쪽짜리”라며 “50년 후, 100년 후 역사가 빨치산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문제를 제기하는 차원에서 서사시를 쓰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가족사도 빨치산에 연루돼 있다고 밝혔다. 그런 개인사가 이번 서사시를 쓰게 한 바탕이 된 것이다.

제주도 4·3 항쟁을 소재로 한 서사시 ‘한라산’을 쓴 이산하 시인은 “송 시인이 빨치산 투쟁사를 소설로 읽는 듯한 느낌이 들 만큼 생생하게 재현했다”며 “그야말로 발로 쓴 작품”이라고 평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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