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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두로 몰락한 아스텍 문명 500년 뒤엔 ‘신종 플루’ 최대 피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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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신종 플루’ 감염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멕시코는 아스텍 문명이 꽃핀 곳이다. 16세기 초 스페인 정복자 코르테스(그림)가 아스텍 왕국을 정복할 무렵 이 지역 인구는 2500만~3000만 명에 달했다. 반면 코르테스 군대는 6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스페인 병사 한 명에 아스텍인 5만 명꼴이다. 압도적인 열세였던 스페인군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

1519년 11월 아스텍 수도 테노치티틀란(지금의 멕시코시티)에 진입했던 코르테스는 1520년 아스텍 군대의 저항에 밀려 퇴각했다. 그런데 코르테스가 퇴각한 지 넉 달 후 테노치티틀란에 천연두가 발생했다. 코르테스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던 지휘관을 비롯해 수많은 아스텍인이 죽어갔다. 천연두를 처음 경험한 아스텍인들은 전염병의 공포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천연두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없었으므로 질병 발생 초기에 인구의 25~30%가 죽어 나갔다. 무수히 죽어 가던 원주민들의 눈에 기이해 보인 현상이 하나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질병이 원주민만 죽이고 스페인인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았다. 같은 감염증이라도 그것을 경험한 집단에는 피해를 주지 않지만, 경험한 적 없는 집단에 침입하면 감염자 상당수의 목숨을 앗아가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방적 현상은 엄청난 심리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초자연적으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전투를 벌이는 양자 중 어느 쪽이 ‘신의 은총’을 받고 있는지는 너무나 명백했다. 코르테스 퇴각 후 발생한 천연두는 스페인군을 공격했던 자들에 대한 신의 징벌처럼 보였다. 신이 일방적으로 침략자들만 두둔하는 것은 신이 백인 침략자의 모든 행위를 인정해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 아스텍인들 중 일부가 코르테스에게 자진해서 복종하기로 했고, 스페인군은 그들의 도움으로 테노치티틀란을 다시 정복할 수 있었다. 천연두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코르테스는 승리를 얻기가 더욱 힘겨웠거나 어쩌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코르테스의 정복으로 원주민과 유럽인이 함께 섞여 살기 시작한 지 50년도 되지 않은 1568년에 멕시코 인구는 코르테스가 상륙하던 당시의 10%에 불과한 30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 후 50년 동안에도 인구는 계속 줄어들어 1620년에는 160만 명이라는 최저치에 도달했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의 인구는 아주 조금씩 늘어났을 뿐이다. 500년 전 참극의 현장이었던 멕시코가 이번에는 ‘신종 플루’의 최대 피해국이라니 안타깝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