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2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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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동성연애를 즐기던 상사는 강성민의 곱상스런 용모를 지나칠 수 없었다.

물론 강성민의 저항에 부닥치긴 했지만, 그의 섬세하고도 집요한 구애는 결국 강성민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당혹스러움과 호기심을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하고 말려들긴 했지만, 그러나 날이 더할수록 강성민은 극도의 수치심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반년 동안이나 정신병원과 시골을 전전하는 각고를 겪은 후에야 상처는 남았지만, 어느 정도의 심정적 안정을 찾는 일은 가능했다.

명색은 화가였지만 그러나 붓을 들 때마다, 구멍 뚫린 가슴으로 밀려드는 자책감 때문에 발작적으로 붓을 던져버리곤 하였다.

걸핏하면, 집을 나가 열흘이건 보름이건 구애받지 않고 낯선 고장을 들개처럼 배회하다가 돌아오곤 하는 낭인 (浪人) 이 되어버렸다.

아내의 헌신적인 희생과 인내만이 지금의 그를 누추하게나마 지탱해주고 있는 셈이었다.

어쨌든 난처하게 된 것은 철규였다.

승희를 사이에 둔 두 사람의 각축을 명쾌하게 희석시킬 방법도 없었고, 서로 상반된 속셈을 가지고 있는 그들의 요청을 매끄럽게 뿌리칠 재간도 없었다.

변씨가 성기능 장애자라는 것을 귀띔해 준다면, 박봉환의 비난과 격분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주저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체류한지 일주일도 안되는 여행자가 승희의 말만 듣고, 한 남자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릴 치명적인 발언을 주책없이 떠벌렸다가 나중에 어떤 불똥이 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성기능 장애가 있다는 것을 몸소 확인한 것일지라도 사안의 중대성으로 보아 입을 헤프게 놀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박봉환과 승희의 관계도 변씨가 넘겨짚은 것처럼 남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농탕질이 분분한 눈치도 아니었다.

결국은 작정을 바꾸어 영동식당에 눌러 있겠다고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형님 같이 속 깊은 분이, 철따구 없는 가스나들매치로 이랬다 저랬다하면 되겠습니껴. 두번 다시 흉측스런 변씨하고는 상종하면 안됩니더.” 만의 하나 번복을 할까봐서 몇 번인가 강다짐을 둔 뒤에야, 겨우 안심하는 눈치였다.

애써 그의 고물차를 팔아준 것도, 그리고 영동식당에 민박을 안내한 것도 이제 와선 속셈이 어디에 있었다는 것이 숙맥이라 하더라도 눈치챌 만큼 명백하게 드러난 셈이었다.

그런데도 박봉환은 시치미를 뚝 잡아떼고, 발가벗긴 속셈조차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튿날 박봉환이가 서울로 떠난 뒤였다.

그가 있을 동안, 어판장 근처는 물론 식당 어름에도 코빼기조차 비치지 않았던 변씨가 식당으로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며칠 바람이나 쐬고 오자는 변씨의 느닷없는 제의가 갖는 직접적인 동기가, 박봉환에 대한 증오나 질투에서 비롯된 것 같아 딱 잘라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서울에서부터 주문진으로 낙향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심층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좌절과 실의의 흔적도 남의 일 같지만 않다는 동병상련이 있었고, 타관 사람인 그에게 보여준 허세없는 호감도 딱 잘라 외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야반도주했다는 그의 아내를 찾아 나설 배짱이라도 생겨 났길 바라면서,가파른 언덕 위의 변씨 집으로 찾아갔다.

예상했던대로 그는 수척한 얼굴에 잔뜩 주눅이 들어있는 안색이었다.

축담 아래 쭈그리고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가 일어서는 그에게서 이상하게 술냄새는 나지 않았다.

인사말도 없이 힐끗 그의 행색을 일별하던 변씨는 방으로 들어가 낡아서 너덜거리는 위에 생선비린내까지 등천하는 가죽 점퍼 하나를 들고 나왔다.

“이 엄동설한에 길 떠난다는 사람의 행색이 그래서야 되겠소.” “어디로 갈 겁니까?” “이런 젠장,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이란 말도 못 들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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