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IMF 차례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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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명절에 올리는 제사를 보통 차례 (茶禮) 라 일컫는다.

우리나라에선 설과 추석에 올리는 제사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지역이나 가문에 따라서는 일년 내내 명칭이 붙어 있는 날은 어김없이 차례를 올리는 곳도 있다.

예컨대 충북 청주 어떤 명문 (名門) 의 종가 (宗家)에서는 차례를 삭망 (朔望).사절 (四節).천신 (薦新) 차례로 구분해 지낸다.

삭망은 매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이요, 사절은 설날.한식.단오.추석 등이요, 천신은 삼짇날.유두.칠석.중양.동지 등이니 한 해에 줄잡아 설흔 번 이상의 차례를 지내는 셈이다.

역시 지역이나 가문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집안의 차례든 공통된 것은 절차와 형식이 지나치게 까다롭다는 점과 많은 음식을 장만해야 한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경제논리로 보면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여 돈과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도 나올 법하지만 집안마다의 오랜 전통이니 나무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없는 집 제사 돌아오듯 한다' 는 속담도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85년부터 정부가 음력 정월 초하루를 '민속의 날' 이라 하여 공휴일로 정했을 때 반대여론이 만만치 않았던 것은 이중과세의 우려 때문이었다.

이때 몇몇 민속학자들이 차례는 연시제 (年始祭) 의 의미로서 양력 1월1일에 지내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공허한 메아리였다.

양력에 지내던 집안조차 거의가 음력으로 돌아섰고, 차례를 양력과 음력 두 번 지내는 철저한 이중과세 집안도 많아졌다.

많은 음식을 차려놓고 조상을 공경하겠다는데야 시비를 걸 까닭이 없지만 이중과세에 따른 차례와 행락 풍조가 우리의 경제를 좀먹는 요인이 돼 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길이 없다.

IMF한파가 거세게 휘몰아치는 올 설은 여느 때와 다르다.

대한주부클럽연합회 등 많은 여성단체들은 'IMF 차례상 차리기' 의 아이디어를 내놓았고, 대다수 가정들이 이를 따르리라는 전망이다.

'검소한 대신 정성만은 그 어느 때보다 듬뿍 담아 차례상을 준비하자' 는 이 아이디어는 우선 꼭 놓아야 할 음식의 가짓수는 줄이지 말고 양이나 개수를 줄여 비용을 절약하라고 권한다.

조상들이 차례상을 내려다보고 있다면 후손들이 어쩌다가 이처럼 어려운 처지에 빠졌는지 측은해 하며 음식의 양보다 오히려 정성에 감복할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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