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코리아 이니셔티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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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국은 패전국 (敗戰國) 인가.

6.25때 낙동강 전선마저 무너지기 직전 유엔군의 도움으로 전세를 뒤집었던 한국은 다시 글로벌 경제 시대 외환 위기의 벼랑 끝에서 국제금융기구와 주요 선진국의 도움으로 국가 부도를 면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주도적 역할을 한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요즘 듣는 가장 모멸적인 소리는 '도덕적 해이 (Moral Hazard)' 다.

“경제위기를 자초 (自招) 한 나라를 도와주면 못된 버릇이 들 수 있다” 는 것이다.

부실은행.기업을 얘기할 때의 용어가 이젠 한 국가를 대상으로 쓰이고 있다.

국제통화기금 (IMF) 을 앞세운 미국의 아시아 지원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펴는 논리다.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 한국은 과연 패전국인가.

남북이 분단된 한반도에서 아직 냉전이 끝나지 않은 것처럼 글로벌 경제 시대에 한국에 닥친 경제위기도 한번의 승패 가름으로 끝날 일은 아니다.

냉전 이후 앞당겨지기 시작한 글로벌 경제라는 새 질서는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기도 전이기 때문이다.

또 6.25가 우리끼리만의 전쟁이 아니었던 것처럼 지금의 외환위기도 한국 경제만의 문제는 아니다.

아시아와 세계의 새로운 질서라는 큰 틀 속에서 위기를 파악하지 않으면 진단.처방은 또 빗나간다.

그렇다면 한국을 패전국이라 단정할 수 있을까. 지금 뉴욕 월가에는 한국의 위기로 인한 큰 장 (場) 이 섰다.

한국을 상대로 월가의 금융기관들이 벌여 놓은 판은 시장 규모로 보나, 거론되는 금리 수준으로 보나 실로 오랜만에 선 큰 장이다.

그러나 지금 미국엔 이보다 훨씬 크고 중요하며 더 많은 이익이 걸려 있는 '논객 (論客) 들의 장' 이 서 있다.

대학.싱크탱크.언론.행정부.의회.국제기구 등에 포진하고 있는 수많은 논객들에게 아시아 위기는 냉전 이후 가장 큰 토론의 장을 열어 놓았다.

이들이 총동원돼 벌이고 있는 '아시아 진단.처방' 은 아시아 위기 이후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규정할 밑바탕 논리를 탄탄히 다지고 있다.

곧 벌어질 의회.행정부의 논쟁, 하루가 멀게 권위지의 오피니언란에 실리는 학자.전직관리 등의 기고, 빈번한 세미나 등을 통해 이들의 논리는 큰 줄기로 수렴돼 가고 있다.

그런데 정작 위기의 당사국이면서도 이같은 논쟁의 한구석에라도 제대로 끼지 못하고 있는 한국은 영영 패전국이 되려는 것일까. 워싱턴에서 한국은 이제 겨우 '개혁 약속을 이행하려는 나라' 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노사정 (勞使政) 이 마주 앉아 준 덕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내에서 할 '기본' 이다.

아시아 위기 뒤에 올 새 세계 질서를 형성해가는 본바닥 토론의 장에 처음부터 끼지 못하면 한국은 계속 끌려갈 수밖에 없고 이는 지식인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권위지의 오피니언란이나 포린 어페어스 등 전문지에 우리 지식인들의 탄탄한 논리가 왜 등장하지 않는가.

재벌.YS 등 국내 문제도 중요하지만 자본주의의 현 단계나 미국의 리더십 등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더욱 중요하다.

학자의 논리가 아닌 기자의 직관으로 이야기하자면 냉전 이후의 글로벌 경제는 아시아 위기를 통해 문화.사회마저 월가의 기준으로 표준화시키려 하고 있으며 한국은 냉전 시대 최후의 전선 (前線) 이자 새로운 자본주의 최초의 전선이다.

미국과 IMF.한국은 '한 배' 를 탔고 한국의 새 성공담은 IMF 체제나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 유지를 위해서도 긴요하다.

국방비 부담을 생산적 투자로 돌려 강한 경제를 일군 미국이 IMF에의 추가 출연, 한국에의 쌍무적 지원을 머뭇거리고 있다는 것은 사뭇 단견 (短見) 이다.

한국이 패전국 아닌 응전국 (應戰國) 이 되려면 가능한 분야에서 우리 나름의 이니셔티브를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 지식인들의 '큰 생각' 이다.

김수길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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