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간 신용거래 실종…물물교환 성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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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현금을 안내면 물건을 줄 수 없다.” 기업들 사이에 현금이 아니면 거래를 기피하는 현상이 지난해말부터 줄곧 지속되며 나아질 기미는 커녕 오히려 확산되고 있다.

때문에 최근에는 거래 자체가 급격히 줄고 필요한 제품들을 맞바꾸는 물물교환마저 성행하고 있다.

금융시스템의 붕괴와 부도사태에서 빚어진 '믿을 거래처가 없다' 는 인식이 실물 부문 곳곳에 동맥경화 현상을 일으키고 실물거래 전체의 마비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중견 건축자재업체인 K사는 최근 30대 그룹에 속하는 S그룹 계열사에 파이프 1억원어치를 파는 대신 같은 값어치의 철근을 받아 계열 건설사에 넘겼으며 J그룹과는 파이프와 강판을 맞바꿨다.

이 회사 관계자는 “거래처에서 물건을 달라는 요구가 빗발치지만 팔지 않는 경우가 많다” 며 “원자재를 재고는 물론 골프회원권까지 담보로 잡히면서 사오는 판에 우리라고 어음만 받고 물건을 팔 수 없는 게 아니냐” 고 반문했다.

당연히 재고가 쌓이면서 K사의 한달 매출은 지난해 가을 80억원에서 이달엔 30억원 정도로 뚝 떨어졌고 그러자니 물물교환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식품업체 산내들측도 “유통업체를 가려 납품하느라 매출액이 지난해에 비해 50% 이상 줄었다” 며 “업계에선 외상값을 의류 등 물건으로 받는 경우가 많다” 고 말했다.

또 쌍용자동차의 부품업체인 안산의 H사는 쌍용에 현금결제를 요구하며 부품 납품을 줄이는 버티기를 하고 있으나 그 결과 자금이 안돌아 종업원의 상여금은 커녕 급여도 3개월째 체불하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현금이 없으면 페인트 등 원자재를 살 수 없어 현금결제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며 “하루 하루 버티기도 힘들어 설 자금 마련은 생각도 못하고 있다” 고 말했다.

한국경제연구원 좌승희 (左承熙) 원장은 “극심한 자금난 속에서 이처럼 '거래실종' 추세가 계속된다면 어렵게 쌓아온 제조업 기반이 무너질 수 있다” 고 지적했다.

한편 기업의 자금난이 심해지면서 전국 15개 주요 공단 입주업체들의 43%가 이번 설에 상여금을 지급하지 못하며 설 전후로 5일 이상 장기 휴무하는 업체도 지난해 4.6%에서 27%로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이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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