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쇼는 그만” … 커지는 독자 생존 목소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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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ㆍ29 재·보선을 앞둔 지난달 22일 인천 GM대우차 부평공장 서문에서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그는 추경예산에 GM대우를 위해 예산 6500억원을 넣겠다고 약속했지만 무산됐다.

인천 부평에 불던 선거 바람이 지나갔다. 여야 정치권이 사력을 다해 맞붙었던 이 지역 4·29 국회의원 재·보선은 야당의 승리로 끝났다. 선거 기간에 GM대우자동차 직원들의 표심(票心)을 노린 선심성 공약이 난무했다. 이를 지켜본 GM대우 직원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1일 만난 생산직 근로자 김정호(33·인천 부평구 삼산동)씨는 아예 투표하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직장 동료 13명과 함께 강화도로 1박2일 야유회를 다녀왔다. 선거 날이 공휴일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그는 요즘 월평균 13일 정도만 일한다. 김씨는 “(야유회 내내) 선거나 회사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고 전했다. “2500억원을 풀겠다, 6500억원을 풀겠다, 이런 말잔치는 있었지만 형님들(직장 선배들)도, 저도 그런 말 안 믿는다.”

대신 일자리에 대한 불안감은 컸다. 2001년 해직됐다 2006년 복귀한 최모(38)씨는 “1725명이 하루아침에 거리에 나앉았다. 2001년의 악몽 때문에 대우차 근로자 사이엔 정치인도, 기업인도 믿을 수 없다는 정서가 퍼져 있다”고 말했다.

사무직도 예외는 아니다. 이 회사는 이달부터 사무직의 고정 추가근무(오버타임) 시간을 제외했다. 임금을 10% 정도 줄이기 위한 고육책이다. 퇴근 시간이 오후 6시에서 5시로 앞당겨졌다. 사기는 꺾일 대로 꺾였다. ‘인재 엑소더스’가 일어날 조짐마저 보인다. 입사 9년차인 김모(37)씨는 “GM이 새 주인이 되면서 GM 계열사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입사한 엘리트 사원들이 꽤 된다. 이런 젊은이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GM, 정부에 2조원 지원 요청”
지역 언론인 부평신문이 전한 한 주민의 반응은 더 냉소적이었다. “국회의원 하나가 GM대우를 살릴 수 있다면 우리나라 국회의원 299명이면 세계 경제를 살릴 수 있겠다. GM대우를 살리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한데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은 살리기가 아니라 살리기 ‘쇼’를 보는 것 같다. 부평 시민과 GM대우를 이용해 정치권이 서로 잇속 챙기기에 바쁘다.”

이번 선거에서 당선된 민주당 홍영표(부평 을) 의원은 “GM대우 문제는 여러 가지가 얽히고설켜 있어 해결책을 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GM대우 살리기가 선거의 핵심 이슈로 부각된 것과 관련, “여당이 먼저 불을 지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이 GM대우 지원책을 내놓자 민주당도 이에 질세라 정세균 대표가 “이번 추경예산에 GM대우를 위한 예산 6500억원을 반드시 넣겠다”고 공언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GM대우 해법은 홍 의원도 인정한 것처럼 복잡한 고차 방정식이다. 유동성 위기에 몰렸던 GM대우는 산업은행 등 8개 시중은행이 선물환 만기를 3개월 연장해 주면서 일단 급한 불은 껐다. GM 본사의 처리 방향이 결정되는 6월 1일까지 한숨 돌릴 수는 있게 됐지만 중장기 현금흐름은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다. 홍 의원은 “GM대우가 정부에 지원 요청한 자금은 알려진 것처럼 1조원이 아니라 2조원”이라고 했다.

1일 방한한 닉 라일리 GM 아시아·태평양지역본부 사장(전 GM대우 사장)이 GM본사 입장을 밝히고 있다.

1대 주주인 GM과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은 샅바싸움 중이다. GM은 이미 여러 차례 GM대우에 대한 자금 지원은 없다고 못 박은 상태다. 산은은 최대주주인 GM 본사의 지원 없이 산은이 혼자 GM대우를 지원하려면 GM대우 지분 등을 추가로 받아야 한다고 요구해 왔다. 현재 GM대우 지분은 ▶GM그룹 50.9% ▶산업은행 27.9% ▶일본 스즈키 11.2% ▶중국 상하이자동차 9.9%다. 스즈키와 상하이차는 GM의 우호지분이다. 산술적으로 산업은행이 GM 지분 중 23%만 넘겨받으면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다.

GM “산은에 지분 넘길 수도”
닉 라일리 GM 아태지역본부 사장은 1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미묘한 발언을 했다. 현재로서는 GM대우의 지분 구조를 바꿀 생각이 없다면서도 산업은행 요청이 있으면 GM대우 지분을 넘기는 것도 논의할 수 있다며 매각 가능성을 열어 뒀다. 지분을 넘길 수도 있겠지만 그 대가는 톡톡히 받겠다는 속내가 엿보인다.

이런 GM의 협상 전략은 2000~2001년 대우차 매각 당시의 씁쓸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1999년 대우차는 워크아웃(기업구조개선)에 들어갔고, 채권단은 이듬해 6월 국제입찰을 통해 포드를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했다. 2000년 9월 포드가 갑자기 인수를 포기하자 주가는 폭락하고 환율과 금리도 출렁댔다.

혼란스럽던 그해 10월 ‘구세주’처럼 등장한 게 GM이었다. 대우차는 11월 부도를 맞았고 채권단 지원으로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GM은 느긋하게 협상에 임했고 한국 정부는 점점 다급해졌다. 당시 GM과 협상에 나섰던 정건용 산업은행 총재가 “GM이 칼자루를 쥐고 우리는 칼날을 쥔 협상이었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2001년 9월 대우차 매각을 위한 양해각서(MOU)가 어렵사리 체결됐다. GM이 대우차 인수에 쓴 돈은 신설 법인에 출자한 4억 달러에 불과했다. 대우차 자산 인수대금 12억 달러는 외상이었다. 그나마 2011년부터 5년에 걸쳐 나눠 갚는 조건이었다.

내수 점유율 10%로 떨어져
그렇다면 GM이 최고의 인수합병(M&A)으로 꼽는 대우차 인수 이후 GM대우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GM대우 홈페이지의 회사 소개 코너를 보면 이 회사 연혁이 2002년부터 나온다. 2002년 10월 GM대우의 정식 명칭인 GM대우오토앤테크놀로지가 출범된 이후의 역사만 나열돼 있다. 그 이전 대우차의 과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실제로 GM에 인수된 뒤 회사가 달라졌다. 대우차 시절 30% 안팎을 유지하던 내수시장 점유율은 2002년 GM대우 출범 이후 10%에 머물고 있다. 그 대신 대우차가 GM의 글로벌 생산기지로 바뀌면서 수출 물량은 연평균 30% 이상 늘었다. 대신 GM대우 브랜드가 아닌 시보레나 뷰익 등의 브랜드로 판매된다. GM대우가 비상장 회사이다 보니 정확한 내부 사정을 알기도 힘들어졌다. 간단한 감사 보고서만 공개될 뿐이다. 파생상품 관련 손실 규모만 나올 뿐 어떻게 그런 손실이 발생했는지 알 길이 없다. 감사 보고서 상의 수출 부대비용 5000억원이 무슨 명목인지 궁금해하는 이도 많다. 부평 공장과 군산·창원 공장에서 생산된 차량의 수출 가격도 철저히 비공개다. 설령 GM이 요구하는 대로 산은이 자금 지원을 하더라도 그 돈이 어떻게 흐르는지 체크할 도리가 없다. GM대우에 외국 임원(ISP·International Service Personnel)이 210명에 달하는 연유도 세간의 관심을 끈다.

GM 인수로 뭐가 좋아졌나
GM대우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향후 해법이나 협상 과정에서 중요한 문제다. 해석은 갈린다. 좋게 보는 쪽은 GM대우가 GM의 알짜배기 자회사라고 한다. 지난해 GM이 전 세계에서 판매한 자동차 835만 대의 23%인 190만 대가 GM대우 손을 거쳤다. 80만 대의 완성차를 직접 만들었고, 110만 대는 중간제품(KD)을 제공해 중국 등 다른 나라 GM 공장에서 조립만 했다. 비중이 커지고 있는 중·소형차는 GM대우가 거의 만든다.

나쁘게 보는 쪽은 GM대우가 GM의 단순 생산기지로 전락해 버린 것 아니냐고 우려한다. GM의 글로벌 전략에 맞춰 중·소형차 생산기지로 활용하다가 신흥국에 비해 비용 경쟁력이 떨어지면 서서히 발을 빼지 않겠냐는 것이다. 실제로 GM대우의 중간제품 수출은 줄고 있다. 신흥국 생산기지를 중심으로 4~5년 전부터 중·소형차 생산의 현지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다.

GM대우가 차지하는 위상은 쌍용자동차와 비할 수 없다. GM대우의 직원은 1만7000여 명에 달하고, 420여 개 1차 협력업체에서 약 14만 명이 일한다. 지식경제부 고위 관계자는 “정부도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다”며 “현재로선 변수가 많아 GM대우의 미래를 예상하기 힘들다”고 했다. 예를 들어 GM과의 느슨한 협력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고, GM의 파산보호와 동시에 GM대우의 법정관리행도 일어날 수 있다. 그는 “GM과 결별해 독자 생존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GM대우 내부의 옛 대우차 출신들로부터 나오고 있다”며 “판매망의 85%를 GM에 의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볼 때 독자 생존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말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기계산업팀장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대우 브랜드를 살리는 방안 등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GM이 계속 GM대우를 이끌더라도 구조조정을 안 할 수는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제 코가 석 자인 미 정부가 해외 사업장을 가만 놔 둘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민주당 홍영표 의원은 “가장 좋은 방안은 GM대우가 (GM 파산보호 이후 독립법인으로 남는) 굿GM에 들어가 서로 윈-윈(win-win) 하는 것이지만 최악의 경우에도 법정관리든, 산업은행이 경영권을 갖든, 국내 기업이 인수하든 GM대우는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선 미국 정부와 의회를 설득하는 정교한 정치·외교적 노력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서경호ㆍ이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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