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리의 눈물’에서 보는 韓流의 위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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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리가 울었다.”

‘섹시 퀸’ 모드로 대한민국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이효리씨. 지난달 22일 CF 광고를 찍으러 중국 상하이에 갔다 훙차오 국제공항에서 한류(韓流) 팬과 기자·파파라치 200여 명에게 둘러싸여 봉변을 당했다. 낯선 공항에 내리자마자 몰려든 인파와 파파라치들의 거친 몸짓…. 그들에게 몰리면 웬만한 남정네도 당황해 자리를 피하려 할 것이다. 중국 인터넷 사이트들은 이효리씨가 쫓기는 모습들을 동영상으로 올려놓았다. 이효리씨 기획사의 관계자는 “한류 스타도 아니고 극비 방문이어서 미리 동선(動線)을 체크하지 못했는데 불상사가 생겼다”고 설명했다. 이효리씨가 뒤늦게 “울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한·중 네티즌 사이에는 미묘한 감정이 흐른다.

‘효리의 눈물’ 논란은 단순 해프닝일 뿐이다. 하지만 한류 차원에선 생각할 대목이 적지 않다. 기자는 2002년부터 3년여간 홍콩 특파원으로 일할 때 ‘한류 열풍’을 쭉 지켜봤다. ‘엽기적인 그녀’ ‘대장금’ ‘겨울연가’는 한류를 허리케인급으로 격상시켰다. 전지현·이영애·배용준·송혜교·장동건·권상우씨 같은 스타들이 줄줄이 떴다. 그래서 현지에 간 한류 스타들은 파파라치들의 추적 대상이다. 그들의 집요함은 악명 높다. 각계 스타와 거물의 스캔들 현장을 잡으려 해외여행을 미행하는가 하면 호텔 룸의 쓰레기통을 뒤져 콘돔 숫자까지 보도한다. 나무에 높이 오를수록 바람도 세고 떨어질 위험도 커진다. 이효리씨가 그걸 모르고 갔다면 ‘스타 관리’의 ABC를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효리씨는 왜 쫓겨야 했을까. 자신을 적대하는 사람이 아닌 한류 팬들 앞에서…. 그것은 소통과 언어의 문제다. 만약 이효리씨가 중국 팬들의 정서와 문화를 알고 간단한 중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면, 이번 사건은 ‘수퍼스타’의 면모를 각인시키는 찬스가 됐을 것이다. 홍콩 스타 청룽(成龍)은 광둥화(廣東話)·푸퉁화(普通話)는 물론 영어·일본어·한국어를 구사할 줄 안다. 기자와 팬들을 상대로 언제나 재치 넘치는 말을 던진다. 기자는 6년 전 홍콩에서 두 시간 동안 그를 만나 ‘한류는 세계화될 수 있을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할리우드의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게 그의 답변이었다. 올해 초 서울에 온 톰 크루즈가 한국어 몇 마디로 얼마나 많은 영화 팬을 녹였는가.

할리우드가 미국 대중문화의 상징인 것처럼 한류는 한국을 알려온 소프트파워다. 그렇다면 한류 스타들은 아시아 팬들과 얼마나 통(通)하고 있을까. 영어나 중국어·일본어로 현지 팬들에게 따뜻한 대화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해외에 나가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어색하게 행동하는 한류 스타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국내에선 잘 모를 것이다. 한국 관련 행사에 엄청난 출연료를 요구할 때도 많다. 요즘 인기 만점인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이 이따금 옆 나라를 깎아내리는 장면을 보노라면 식은땀을 흘리게 된다. 한류는 지금 재도약을 하느냐, 한류(寒流)가 되느냐 갈림길에 서 있다. 그런 점에서 현지 언어와 문화를 배워 중국 대륙에 풍덩 뛰어든 장나라씨, 어릴 때 일본 무대에 도전한 보아는 군계일학이다.

국제도시로 통하는 홍콩·싱가포르에선 일반 직장인도 2~3개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밥을 먹고 산다고 말한다. 중국어·영어는 기본이고 일본어·한국어 같은 제2외국어를 해야 ‘사람 대접’을 받는다. 연예인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 모델과 한국 영화 출연 경험이 있는 천후이린(陳慧琳)이 한국 팬 앞에 서기 위해 한국어 몇 마디를 애써 배우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이제 한류는 일류(日流)·화류(華流)와 함께 국내외 시장을 놓고 무한 경쟁하는 시대를 맞고 있다.

이웃 나라와의 소통 문제는 연예계의 문제만이 아니다. 요즘 교육 당국은 영어 몰입 교육에 쏠려 제2외국어를 무시하고 있다. 글로벌 시대에 ‘통(通)하는 한국’을 만들려는 의지가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한국 경제의 높은 대외 의존도와 급증하는 국내외 인적 교류를 감안하면 외국어는 가장 중요한 경쟁력 변수 중 하나다. 중국어·일본어를 모르는 미래 세대가 동아시아 시대의 주역이 될 수 있을까. 싱가포르는 일찌감치 재취업 교육과목 중 하나로 중국어를 집어넣었다. 금융위기 이후 원화가치가 떨어지면서 요즘 서울 거리에는 일본·중국 관광객이 넘쳐흐른다. 올 들어 3월까지 서울에 온 외국인 199만 명 중 159만 명이 아시아에서 온 관광객이었다. 그들이 당신 앞에 다가섰을 때 당신은 어떻게 소통하고 어떤 한국을 보여 줄 것인가. ‘효리의 눈물’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정치·국제부문 에디터 yas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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