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뜰 앞에 핀 매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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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호 11면

1『님의 침묵』 한성도서 초간본(1950년) 2 『님의 침묵』 회동서관 재간본(1934년)

남한산성에 시(詩)가 있다. 만해 한용운(1879~1944) 전문 박물관인 만해기념관이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에 있다. 신구대 교양학과 교수인 전보삼(59) 관장이 1998년 열었다. 그는 평생 만해 사상을 연구한 만해 전문가다. 왜 하필 만해였나.

이경희 기자의 수집가 이야기 - 전보삼 만해기념관장

강원도 강릉에 살던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인구 10만 명가량의 소도시에서 같은 사람과 같은 이야기만 해야 했다. 서쪽으로는 대관령이, 동으론 바다가 가로막았다. 답답했다. 마침 집 옆에 오가는 객승이 머물던 포교당이 있었다. 하굣길, 섬돌 위에 모르는 신발이 있으면 뛰어들어가 넙죽 절하고 물었다. “스님,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색즉시공이 뭡니까? 윤회가 뭡니까?”

반야심경은 외우다시피 했고, 팔만대장경도 읽었지만 그 뜻은 모르던 소년이었다. 한 객승이 “옜다, 이거나 읽어라!”며 걸망에서 책을 꺼내 던졌다. 『님의 침묵』이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회자정리’ ‘색즉시공’이 다 그 속에 있었다. 만해 수집광은 이렇게 태어났다.

그는『님의 침묵』 160여 판본을 비롯해 3000여 점을 모았다. 그에게 『님의 침묵』은 시로 쓴 팔만대장경이요, 석굴암과 견줄 수 있는 20세기 민족 최고의 걸작이었다. 1980년 만해가 생전 집필하던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 기념관을 열었다. 한 달에 몇 명 올까 말까였다. 사람 있는 곳으로 가야겠구나, 깨달았다. 남한산성이 절묘했다. 한 해 관광객 300만 명이 오는 곳. 남한산성에서 팔도 승려들이 나라를 지키려 싸웠다. 서산ㆍ사명대사의 호국불교 정신을 이은 만해 사상에 들어맞았다.

“조선왕조 실록에 남한산성이 4000번이나 나옵니다. 그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해요. 그냥 ‘닭도리탕’ 먹는 곳이 아니란 말이죠.”
전 관장은 더 나아가 남한산성을 ‘에코 뮤지엄’으로 조성할 작정이다. “여긴 반딧불이랑 가재가 살아요. 소나무 숲 20만 평에선 피톤치드가 엄청나게 나오죠.”
그는 남한산성 행궁 정비 초대 단장을 맡았다. 한 해 관람객 4만 명에 달하는 만해기념관은 사립 박물관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 탁월한 마케팅 마인드다.

“1000원이 1만원보다 클 수 있다는 걸 알아 가는 게 문화입니다. 양적 크기만 재다 보면 거품이 끼고 망가져 가죠. 그게 다 만해 철학에 나와요. 작은 게 큰 걸 이겨요. 겨자씨 속에 수미산이 들어 있다고 했어요.”

대체 『님의 침묵』 사상이 무엇이기에. 그는 뜰 앞의 황매를 가리켰다. “본 사람은 느끼죠. 거기 가니 황매가 기막히더라…. 본 사람은 보살입니다. 보지 않은 사람은 중생, 슬픈 존재죠. 느끼게 해 준 뜰 앞에 핀 매화 그 자체가 부처, 즉 비로자나 법신불입니다. 님은 그 자리에 있는 진리 그 자체입니다.”

중생은 상견(常見)과 단견(短見)에 사로잡혀 지지고 볶는다. 그걸 뛰어넘어 법신과 현상의 세계를 넘나들면 물욕이, 권력이 휴지 조각이다. 만해가 일제 치하에서 변절하지 않은 이유도 그런 깨달음 때문이었단다.

“돈 되는 것만 하려는 탐욕이 우리 시대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어떻게 사느냐는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해야 풍요로워집니다.”
기념관을 여는 대신 식당 세를 줬으면 매달 1000만원은 벌었을 게다. 주말에 쉬고 싶어도 박물관에 나가 만해 사상을 설명한다. 그게 아는 자이자 가진 자가 해야 할 일이라서다.

“내 주머니에 금강석을 넣어 줘도 머릿속에 가난뱅이 의식이 있으면 금강석은 누더기 속에 방치됩니다. 문화의 부가가치는 무한해요. 돈만 많으면 선진국이 됩니까? 문화가 있어야죠.”
그런 깨달음 역시 만해의 시에서 얻었다. 그에게 『님의 침묵』은 뜰 앞의 황매였다.


중앙일보 10년차 기자다. 그중 5년은 문화부에서 가요·방송·문학 등을 맡아 종횡무진 달렸다.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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