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실업시대]中.빨리 겪을수록 좋다(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연구기관들이 예상하는 올해 국내 실업률 4~5%는 제2차 오일쇼크로 마이너스 성장을 했던 지난 80년대초 이후 처음인 고율이다.

'정리해고의 나라' 미국의 경우 79년 이후 4천3백만명이 일자리에서 밀려났다.

같은 기간 7천만개의 새 일자리가 생기긴 했으나 이들 중 상당수가 임금을 대폭 낮추고 직업훈련을 받아 전공과 무관한 일에 자신을 맞춰야 했다.

이때 사립대학의 한 교수는 실직한 뒤 시간당 15달러 임금의 목수로 재활하기까지 2년간 93번이나 취직에 실패, 구호식품과 술로 연명하기도 했다고 한다.

미국의 각종 금융기관은 86년 1만4천개에서 95년 6월 1만개로 줄면서 1백50만명이었던 직원 중 1백5만명이 직장을 잃었다.

한계기업들은 물론 AT&T나 IBM 등 일류회사들도 지난 92~95년 사이 종업원 30% 이상을 해고했다.

이제 가공할 고실업의 공포가 우리에게 밀어닥치고 있다.

정부는 성장률 1%포인트 하락에 최소한 0.5%포인트씩 실업률이 올라갈 것으로 보고있다.

정작 문제는 올 한해 적당히 견뎌서 실업대란이 지나갈 것 같지 않다는 데 있다.

재경원 고위관계자는 "성장이 위축될 경우 고용시장은 3~6개월 이상 시차를 두고 얼어붙는 점을 감안하면 내년도 실업문제가 더 걱정이지만 정부로서 내놓고 알릴 수도 없는 입장" 이라고 털어놓고 있다.

해외의 시각은 더 비관적이다.

세계적 컨설팅사인 '부즈.알렌 해밀턴' 사는 지난해 "한국의 유보실업률은 일반 실업률의 4~5배에 달한다" 고 분석했다.

유보실업 (Pent - up Unemployment) 이란 국내업체들이 선진국 업계와 달리 이미 경쟁력을 상실했는데도 해고를 못하고 껴안고 있는 예비 실업자군을 말한다.

이 회사는 96년 한국의 실업률이 2.0%로 발표됐지만 유보실업률을 감안하면 대략 11.3%에 달한다고 평가했다.

실업률 11%가 의미하는 실업자는 무려 2백40만명. 4인가족을 기준하면 대략 다섯가구 중 한 가구는 실업자 가구가 된다는 계산이다.

전문가들은 유보실업자가 실제 거리로 내몰리는 상황을 막으려면 "구조조정이란 매를 빨리 맞아야 한다" 고 지적한다.

영국은 지난 79년 대처 총리의 집권과 함께 일찌감치 '매' 를 자청했다.

영국정부와 국민은 함께 만성적인 국제수지적자와 고임금.인플레라는 '영국병' 치유에 나섰다.

2만여명의 해고가 예상되는 20개의 광구를 폐쇄했고, 최저임금제를 폐지하는 등 '유연한 노동시장' 을 만들어 나갔다.

그 결과 미국보다도 노동비용을 낮추는 데 성공, 실업률은 87년 11.1%를 고비로 한자릿수로 떨어졌고 현재는 유럽에서 가장 낮은 실업률 (97년 3분기 5.3%) 과 탄탄한 성장세 (97년 1분기 3. 2%) 를 기록하고 있다.

'실업 대란' 을 통해 실업을 잠재운 것이다.

이상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